[프랑스:히보빌레] 히보빌레의 겨울 풍경

작은 마을에서 찾은 평온함

by 김풍류

디종에서 콜마르로 달리는 동안, 졸음과 설렘이 번갈아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잠시 눈을 붙였다가 창밖을 스치는 겨울 풍경을 보면, 이내 온갖 크리스마스 장식과 와인 향이 떠올라 잠이 달아나곤 했다. 사실 이번 여행의 큰 목표 중 하나가 ‘유럽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 그중에서도 알자스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직접 느껴보는 일이었다. 스스로도 ‘이 피곤함에 운전을 4시간 넘게 하는 게 과연 합리적인가?’라고 몇 번이나 묻다가도, 결국 “가야만 해”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훨씬 더 또렷하게 들려 왔다.

우리가 묵을 곳은 콜마르 외곽의 베스트 웨스호텔이었다. 평소 10만 원 안팎인 이 호텔을 30만 원에 예약할 때, 약간의 자괴감과 묘한 들뜸이 교차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이렇게나 강력한가. 이게 곧 수요와 공급의 민낯이겠지.” 중얼거리면서도, 늦은 밤에 방 한 칸 없는 상황보다는 백 배 나으리라 여겼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비즈니스 호텔치고 직원들이 놀라울 만큼 밝고 다정했다는 사실이다. 냉장고가 없다는 불편쯤은, 사람들의 따뜻한 미소 앞에서 별것 아니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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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마르 시내를 잠깐 둘러볼 때, ‘뜬금없이’ 눈에 띈 것은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뉴욕도 아닌데, 이게 뭔가?” 하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이 조각상을 만든 바르톨디가 콜마르 출신임을 알고, “그렇다면 꽤 합리적인 예우네” 하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동시에 ‘원조치고 의외로 아담하네?’라는 일말의 장난스러운 생각도 스쳤는데, 그건 어쩌면 온몸에 스며들던 졸음을 날려 보내는 데 충분한 자극이 되었다.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내내 갈망하던 히보빌레(Ribeauvillé)로 향했다. 디종에서 이미 오래 달려왔기에 15분 정도의 거리는 오히려 반가운 편이었다. 게다가 차창 너머 펼쳐진 포도밭은 수수께끼처럼 차분한 풍경을 선사했다. 겨울이라 앙상해진 포도나무 사이로, 여름의 푸르름과 가을의 황금빛이 겹쳐 상상되는 기묘한 장면이 이어졌다. “이런 풍광이 사람들을 알자스로 불러들이구나” 하고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KakaoTalk_20250216_100303500_11.jpg 해당 사진은 24.07에 찍은 사진 / 겨울에는 앙상한 나무들만 남아있지만 다른 매력


무료 주차장에 손바닥만 한 자리가 하나 남아 있었다. 몇 번이나 핸들을 돌렸다 풀었다 하며 겨우 차를 밀어넣고 나니, 땀이 살짝 배어났다. 그래도 빈자리를 찾았다는 안도감이 피곤함을 덜어주었고, 어느덧 “오늘 운이 꽤 따르네”라는 작은 기쁨이 피어올랐다. 차 문을 여니, 찬 공기 속에 옅은 캐럴 소리가 실려 들어와 더욱 들뜬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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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서 시작해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떤 가게는 창문마다 과감한 리본과 장식을 내걸어 시선을 붙들었고, 또 다른 집은 간결한 리스 하나만으로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살짝 다른 향신료와 과일 향이 섞인 뱅쇼(Vin Chaud) 냄새가 풍겨오기도 했다. 지나치는 사람들 역시 미묘하게 설렘으로 빛나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이 전체적인 축제 분위기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조금 걷다 보니, Fontaine Place de la Sinne라는 작은 광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담한 분수대를 둘러싸고 크리스마스 마켓 특유의 분주함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분수대 위를 장식한 등불과 금빛 별은, 언뜻 보면 과한 듯하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이 도시와 잘 어울렸다. 그 주변으로 귀여운 소품을 늘어놓은 상점들이 하나둘 나타나는데, 가족끼리 혹은 연인끼리 웃음을 머금고 지나다니는 모습이 마치 동화의 한 장면처럼 평화롭고 환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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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그때의 인상은 ‘작지만 거대한 행복’이라는 한마디로 귀결된다. 앙상하지만 꿈꾸는 포도밭, 오래된 돌바닥을 수놓은 은은한 장식, 우연처럼 발견한 작은 주차 자리 하나조차도 서로를 다정하게 감싸는 느낌이었다. 몸은 다소 피곤해도, 운전이 녹록지 않아도, 결국 이런 순간들이 “역시 여행은 괜찮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준다. 히보빌레라는 작은 마을의 첫인상은, 그 어느 것보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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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품샵에 들어가 직접 만든 듯한 장식품이나 기념품을 구경하고 있으면, 이곳에서 와인과 관광이 얼마나 중요한 일상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가게마다 치즈나 샤르퀴트리를 정갈하게 진열해 놓은 모습도 보이고, 알자스다운 화이트와인이나 크레망(Crémant)이 탑처럼 쌓여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왔다. 일단은 차량 이동이 이어질 테니 다음 방문을 기약하며 마음속 장바구니에만 살짝 담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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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슬슬 고파질 즈음, 길 위에서 파는 까르페와 뱅쇼 한 잔을 사 먹었다. 낡은 파라솔 아래, 부부로 보이는 분이 분주하게 와플과 뱅쇼를 만들고 있었는데, 언어가 막히는 순간에도 웃음과 손짓만으로 충분히 따스한 교감이 전해졌다.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뱅쇼를 마시겠노라 마음먹었는데, 첫 잔을 여기서 음미하게 되다니. 시나몬과 과일 향이 어우러진 그 온기 덕분에, 한겨울 여행의 묘미가 다시 한 번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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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면서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골목 골목마다 조명이 켜지고 낯선 전구 빛이 다소곳이 반짝였다. 낮에 봤던 거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흐르는데,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마저 어딘가 몽글몽글하고 다정하게 들렸다. 주변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 불빛과 소리 덕분에 마음만은 참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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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삼사 시간쯤 되어 “이제 슬슬 콜마르로 가야겠다” 하고 시계를 보았다. 작은 마을이니 금세 한 바퀴를 돌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크리스마스 장식 하나하나에 시선을 주고 맛보고 느끼다 보니 시간은 생각보다 훌쩍 지나 있었다. 히보빌레의 겨울 풍경은 그렇게 내 속에 아주 깊숙이 스며들었다. 앙상한 포도밭, 고딕풍 성당, 첫 뱅쇼의 달콤한 향기 이 모든 장면이 오랫동안 잔상을 남길 듯하다.


마지막으로 “다음에는 저 언덕 위 성도 꼭 올라가 보고 싶다”라고 중얼거리며 차에 올랐다. 뒷모습으로 사라지는 히보빌레의 불빛들을 가만히 바라보니, 꼭 고즈넉한 와인 한 잔에 살짝 취한 기분이 들었다. 그 잔잔한 취기를 간직한 채, 다시 콜마르를 향해 부드럽게 페달을 밟아 나갔다. 여행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장 큰 선물은, 때로는 이렇게 작고 낯선 마을에서, 오래도록 기억될 평온함을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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