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뿔소 돌인형@중국 청두
청소하다가 코뿔소 인형을 떨어뜨렸다. 그 인형은 판다의 고향 청두의 어느 예술품 골목에서 데려온 녀석이었다. 급하게 주워 올리고 보니 코뿔소의 상징 뿔 두 개가 부러져 있다. 순간 내 안에서 나를 단단하게 잡아주던 무언가가 부러진 느낌이 들었다. '아, 이 녀석은 내 토템이었는데.'
내가 토템의 쓰임을 처음 알게 된 건 영화 <인셉션>에서였다. 영화에서 '인셉션'이란 사람의 무의식에 들어가 어떤 생각을 심는 걸 말한다. 생각을 심으려면 상대방의 꿈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꿈이 너무 현실 같아서 내가 꿈속에 있는지 현실에 있는지 구분할 수 없다. 그때 필요한 게 토템. 주인공 코브의 토템은 작은 팽이인데 그는 자신이 겪는 일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때 팽이를 돌린다. 팽이가 멈추지 않고 계속 돌면 꿈속에 있다는 뜻이다. 그때 생각했다. "토템이라는 건 나를 보호해주는 은밀한 물건이구나."
훗날 <아티스트 웨이> 워크숍을 하면서 나의 토템을 정하는 활동을 하게 됐다. <아티스트 웨이>는 줄리아 카메론이 만든 내 안에 있는 창조성을 일깨워주는 프로그램이다. 우리는 모두 창조성을 갖고 태어나는데 살아가면서 그 창조성이 억눌려 발현되지 못하고 있다며 12주간의 워크숍을 통해 창조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자는 게 이 프로그램의 취지다.
12주 동안 매주 수행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지는데 그중에는 ‘나를 알아가는 질문’이 상당수다. 때론 피하고 싶거나 상처를 떠올리게 되는 질문들도 있지만 솔직하게 답하다 보면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삶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알게 된다. 과거와 현재를 새롭게 보게 되고 이것은 앞으로 삶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 워크숍은 (내가 기획부장으로 있는) 서점 책이는당나귀에서 진행됐다.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이 '나도 한 번 예술가가 되어 보자'며 매주 일요일을 <아티스트 웨이>로 시작했다. 일주일 동안의 생활을 이야기하고 각 질문에 대한 답도 솔직하게 교환했다. 길어 보이던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저자가 주장한 것처럼 갑자기 창조성이 발현되어 예술가가 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 안에 잠들어있던 어린 예술가를 깨워내는 성과는 있었다. 내 삶의 무기력과 불만족도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우리는 모두 그 해의 가장 잘 한 일로 <아티스트 웨이>를 꼽았다.
워크숍 9주 차 토템을 정하는 과제.
아티스트의 토템을 한 가지 고른다. 인형일 수도 있고 조각품이나 태엽 감는 장난감일 수도 있다. 자신이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을 고른다. 당신이 고른 토템을 특별한 곳에 놓아두고 어린 아티스트를 보호해주자.
<아티스트 웨이>
많은 고민을 했다. 온갖 것이 다 튀어나오는 마술 주머니를 가진 도라에몽으로 할까? 평온한 마음을 가져다주는 종교적인 물건으로 할까? 그러다 서재 한 구석에서 먼지를 맞고 있는 작은 코뿔소 인형과 마주쳤다. 솟은 뿔, 앙다문 입, 번득이는 눈. 한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인형이지만 연약한 나를 보호해줄 것 같은 느낌이다. 녀석과 함께라면 숫타니파타의 구절처럼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중 (내가 많이 좋아해서 자주 인용하다 보니 이젠 정말 식상해진 말 ㅎ)
'그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자. 시류에 편승하지 않아도 좋다. 남과 다른 삶을 살아도 좋다. 그딴 것 의식하지 말고 꼿꼿하게 내 길을 가자. 온갖 더럽고 부패한 오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인간이 되자.'며 코뿔소를 마음에 담고 살았는데 그런 녀석이 부러졌으니 내가 꺾이는 느낌이 드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세상에 부러지지 않는 영원한 무언가가 과연 존재할까? 외부 풍파와 예상치 못한 시련으로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서 걷는 것, 그게 우리 삶이 아닐까. '기쁨과 마찬가지로 슬픔도 사람을 키운다'는 신영복 님의 말을 떠올리며 부러진 뿔을 목공풀로 붙인다. 뿔의 상처가 불필요한 가지를 처낸, 나무의 옹이 같다. 한층 더 단단해진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