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아니고 서울 빌라 - 1
비스듬하게 비추고 있는 창가의 오후 녘 햇살이 창틀에 걸려있었다. 그날은 유독 장을 봐온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누워만 있고 싶었던 날이었다. 느지막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를 듣고 소파에 누인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쾅, 쾅, 쾅
"계세요?"
-쾅, 쾅, 쾅
적막했던 집안이 소란스럽게 뒤바뀌고 마치 끓는 물이라도 엎지른 듯 허겁지겁 일어나 현관을 바라봤다. 현관 앞에는 장을 봐온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누, 누구세요?"
"아랫집인데요, 잠깐 나와보시면 안 될까요?"
겁이 났다. 평상시 일면식도 없었던 아랫집에서 왜 찾아왔을까, 순식간에 나른한 오후는 쿵쾅대는 소리로 귓가를 멍멍하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대답을 하다니,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평상시 같으면 지금 시간대에 집안에 아무도 없을 시간대이기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원망을 사지 않았을 텐데, 그저 사람이 없는 척을 했으면 그만이었을 텐데.
-철컥
빼꼼하게 현관문을 연 틈 사이로 땀이 흥건한 남자가 서있었다. 목소리로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덜컥 문을 여니 짧은 머리가 빳빳하게 곤두서있는 남자였다. 그는 성별 구분이 거의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이 추운 날씨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으로 흥건하게 적셔져 있다는 점이 더욱이 현관문을 활짝 열기 힘들게 만들었다.
"무, 무슨 일이세요?"
"이 시간대에 보통 없으시죠? 계셔서 다행이네요."
"혹시 시끄러우셨나요..?"
"아니요, 전혀요. 다른 게 아니라 제가 며칠 전에 이사를 왔거든요. 꼭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네..?"
"아, 요즘 이렇게 인사드리는 게 흔한 일은 아니라서 놀라셨나 봐요. 맞습니다, 제가 오지랖이 좀 넓고..."
"아, 네, 이사 오셨군요?"
"네네, 이 동네는 처음이라서요. 윗집이 시끄러우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게도 너무 조용하더라고요."
"네... 집에 사람이 많이 없어서요."
"혼자 사시나요?"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다들 바빠서요."
"그렇군요, 다음번에 저희 집에서 동네분들 초대해서 식사를 좀 대접하려고 하는데, 그때 오세요! 이번 주 금요일 저녁이요."
"아, 일정 봐서 괜찮으면 갈게요..."
"연락처를 좀 물어봐도 될까요?"
"네? 아, 네. 핸드폰에 찍어 드릴게요."
"그럼, 그때 뵐게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철컥
전화번호는 왜 넘겨줬을까, 스스로를 원망하기에는 너무 빠른 시간에 낯선 이에게 번호를 넘겨주고 말았다. 그는 우람한 발소리로 계단을 내려갔다. 이 건물은 신축이지만 워낙 층간에 소음이 잘 들리는 구조였다. 그래서 저녁 퇴근 시간대가 되면 어떤 집에 사는 누가 몇 시에 집에 들어오는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10여 년간 혼자 살면서 낯선 이가 나의 집에 찾아와 자신의 집에 초대한 적은 없었다. 내가 사는 건물은 한 층에 4세대가 사는, 지극히 평범한 빌라 건물이었다. 건물 주인이 가끔 수도세가 밀리면 찾아와 사람이 사는지만 확인하고 가는데, 이렇게 누군가가 와서 내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건넨 적은 처음이었다.
'괜히 번호를 넘겨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잠시, 그가 다녀간 후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다시 소파에 누워 어지러운 마음을 달랠 겸 휴대폰을 보면서 킥킥 대고 있었다.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오기 전까지 말이다.
'안녕하세요(이모티콘) 오늘 너무 갑작스러웠죠? 죄송해요, 좋은 이웃을 만나 행복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한가득 몰려왔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이렇게 흉흉한 사회에, 남자라서 가능한 거 아니야? 아니지, 여자라고 이웃들이랑 같이 못 지내는 일이 있어? 아니지, 여자라면 누군가 내 집에 갑자기 들이닥칠 수도 있는 일이니 얼굴을 내놓고 혼자 산다고 인사하고 다니지도 못 하잖아?
현관문에는 남자 사이즈의 작업 신발이 두 켤레 놓여있었다. 얼마 전, 친구는 밤길을 가다가 모르는 사람이 집 앞까지 쫓아온 일이 있었고 그 남자에게 다가가 따지려다가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집에 들어오면서 '아빠!'라고 크게 외쳤던 일을 들려줬다. 그 얼마 전, 다른 친구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남자 손님에게 무시를 당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있을 때는 깍듯이 대한다는 그 남자 손님 욕을 3시간 동안 한 적이 있었다. 그 얼마 전에는, 그전에는, 그리고 뉴스에서는, 그리고 온라인에서는...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소식들을 미루어보면, 나의 생각들이 멀지 않은 두려움 속에서 자라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낯선 이들을 모두 경계해야 할까?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모두를 경계하고 보는 게 차선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 또한 누군가를 향해 낯선 이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피해자의 행렬에 내가 혹은 나의 가족이, 나의 친구가 끼어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이름 없이 불행한 사건으로만 바라보게 된 나의 시선들은 누구에게 닿고 있는지, 어딘지 불행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상황을 목도하는 데에 한 숟가락을 보태고 뒷짐 진 나의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껏 불안한 마음들을 계속해서 새로운 이미지로 짜깁기된 휴대폰 화면을 오랫동안 보며 달래고 있는데, 또다시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다. 그 예감은 현실이 되어 정박자로, 리드미컬한, 음악소리가 방바닥을 때렸다. 오후 5시, 시간대는 적막함이 당연하지 않은 시간대였다. 어느 정도의 음악소리 정도는 괜찮지만, 이렇게 크게 노래를 들어도 되는 걸까 싶은 정도의 소리는 용납하기 힘들었다. 특히나 하자가 많은 신축 빌라에서는 옆집에서 이야기 나누는 소리도 다 들리는 마당에, 이 정도 소음이라면 건물이 쩌렁쩌렁 울릴 일이었다.
-그가 살던 304호에서는 이전에 갓난아이가 2명이 있는, 신혼부부가 살았었다. 이 사실을 알 수 있는 이유는 304호가 이사한 이유가 204호에서 시끄럽다고 하도 민원을 넣는 바람에 쫓겨나다시피 나갔기 때문이었다. 갓난아이가 2명이 있어, 밤낮으로 시끄럽게 우는 아기 울음소리가 건물 전체에 온종일 울려 퍼졌었다. 나는 소리에 예민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참았었다. 다행히도 윗집으로 올라오는 소음은 늦은 밤이 되면 잦아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래층으로는 그 소리가 밤에 더 울렸던 모양이다. 그들이 이사를 나가고 한동안은 조용하겠거니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보다 더 쩌렁쩌렁 울리는 음악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동안 시달리다 얼마 전 자유를 만끽했을 204호에서 어떻게 대응을 할지 걱정과 기대를 뒤섞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