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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힘이 되는 마케팅_1

경천사지 석탑이 삐딱한 위치에 있는 이유

by 초월김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고려시대의 탑인 "경천사지10층석탑"이 전시되어 있다.

고려 후기 원나라 간섭을 받던 충목왕 때(1348년) 세워진 탑인데, 층수가 짝수(10층)인 것도 그렇고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모양을 가지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일반적인 탑과는 달리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도 특이하고,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원각사지10층석탑(국보 2호)에 영향을 준 탑이기도 하다.

(실제로 사진을 놓고 보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


경천사는 개성시 외곽에 있었던 절이라, 사실 원래 자리는 북한이라 볼 수 없었을 뻔한 탑이기도 하다.

그런데 1907년 일본의 궁내부대신(장관)인 다나카 미쓰아키라는 자가 이 탑을 무단 해체해서 일본으로 반출해버린다.

다행히 헐버트 박사가 이 사실을 듣고 분노하여 베델의 대한매일신보에 이 사실을 제보하여 공론화시킨다.

헐버트는 1886년 왕립 육영공원의 영어교사로 초빙된 이후 한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이며,

베델은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고종 복위운동을 하는 등 역시 대한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대한외국인이다.

일본이 무시로 일관하자, 헐버트는 미국의 뉴욕포스트에 제보하고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헤이그에서도 연설을 하여 국제사회에 널리 알린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1918년, 결국 경천사지 석탑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반환되었다.

이후 40년 가까이 경복궁에 방치되었지만 대리석 보존을 위해 실내 전시가 결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경천사지석탑은 중앙홀에 위치하여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데, 자세히 보면 홀 한가운데 전시되어 있지 않다.

탑을 만든 이유와 양식이 고려 고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 간섭기에 원나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었고, 그래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원나라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 개관하면서, 역사의 가로라는 중앙 통로의 중앙축에서 "의도적으로" 어긋나게 세우기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우리 고유의 역사성에서 빗겨나간 탑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사실 중앙 축에서 어긋나 있는지 알기 어렵다.

기획자나 마케터는 항상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기획을 해야 비로소 그 진가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 의도나 목적을 너무 드러내기보다는 Micro Value로 표현될 때 고객은 감동하고 감탄한다.


만약 경천사지석탑이 중앙축에서 완전히 틀어진 한쪽 복도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기획 의도를 분명하게 반영하려면 그 쪽이 나을 수도 있겠지만, 대칭의 균형미가 중요한 탑을 관람하는 측면에서는 분명히 어색했을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왜 탑이 한쪽에 쏠려서 전시되어 있는지 궁금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천사지석탑은 몽골의 영향을 받은 탑이지 몽골의 탑이 아니다.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우리의 탑이고, 이 탑이 굳이 몽골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각할 이유는 전혀 없다.

미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가 더 중요하고 그러려면 중앙에 딱 맞게 전시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일 것이다.

그렇게 이 탑의 전시에 대해 고민한 사람들은 "조금 옆으로 옮기는 수준"에서 타협하였다.

전시장의 천창에 유리창으로 된 박공 지붕이 있는데, 그곳을 바라보면 중앙에서 약간 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수준. 심지어 그렇게 전시한 이유를 굳이 기재하지도 않았다.

중앙이 아니라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 것이고, 그 정도의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그 의도를 스스로 파악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은근하다"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은근히" 전달되는 메시지가 때로는 직접 말하는 메시지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경우도 있다.

피망 뉴맞고의 2010년 캠페인의 슬로건은 "사는 데 은근히 힘이 됩니다"였다.

내가 만든 슬로건은 아니지만, 우리팀 모두가 1등으로 선택한 슬로건으로 맞고를 치면서 일상의 피로를 "은근히" 해소하는 것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은근한 이야기, 은근한 마케팅.

앞으로 nudge와 micro value로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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