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은근히 힘이 되는 마케팅_2

사는데 은근히 힘이 되었던 피망 뉴맞고

by 초월김

https://brunch.co.kr/@bicco/23


을지문덕 장군은 그 유명세에 비해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인물이다.

생몰년도도 미상이며 심지어 성이 '을'씨인지, '을지'씨인지, 혹은 제3의 성씨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분명한 건 살면서 '을지' 성을 가진 사람을 이분 말고는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612년,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청천강(살수)에서 수공으로 몰살시킨 살수대첩의 주인공으로 역사에 강렬하게 등장하지만, 딱 그 장면을 끝으로 다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화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수나라는 비록 3대 38년 만에 망해버린 단명 왕조였지만, 이후 중국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당대 동아시아 최강대국이었다.

을지문덕 장군은 이러한 수나라를 맞아 단순히 적을 물리친 정도가 아니라 전멸에 가까운 대승(30만 병력 중 2,700명 생존)을 거두었기에, 비록 기록이 전무할지라도 역사에 길이 남을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사실 살수에서의 공격이 있기 전, 수나라는 대군을 이끌고 들어왔으나 지지부진한 전황으로 지쳐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보급 문제까지 겹쳐 나아가기도, 물러서기도 애매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이때 을지문덕이 적장 우중문에게 보낸 시 한 수가 전해진다.

바로 그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다.


"그대의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이미 공이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보통의 협상가라면 "너희 지금 보급 힘들지? 우리가 다 알고 있으니 큰 코 다치기 전에 물러가라"라고 협박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도 물러갔을 수 있겠지만, 우중문 입장에서는 '패배해서 도망가는 꼴'이 되어 퇴각의 명분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을지문덕 장군은 상대를 조롱하거나 깎아내리는 대신 "너 이미 충분히 잘했어. 지금 돌아가면 승리한 장군으로 남을 수 있어"라는 메시지를 은근히 심어주었다.

적장의 명분(체면)을 세워주며 스스로 '철군'이라는 행동을 선택하도록 유도한 부드러운 개입이었다.

이 편지를 받은 우중문은 결국 퇴각을 결정했고, 돌아가던 길목인 살수에서 그만..역사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을지문덕 장군처럼 위대한 넛지도 있지만, 사실 팔꿈치로 쿡쿡 찌르는 행위를 뜻하는 '넛지(Nudge)'는 행동경제학과 마케팅 분야에서 이미 널리 쓰이는 개념이다.

'은근한 개입' 혹은 '부드러운 개입'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사람들의 행동을 은근슬쩍 기획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을 눈에 띄는 분홍색으로 설치한다거나, 고속도로 진입로 유도선을 다양한 컬러로 칠해 진행 방향을 직관적으로 알려주는 사례가 있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주로 긍정적인 행동 변화에 초점을 맞추지만, 마케팅에서의 넛지는 종종 '상술'로 치부되며 부정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100원에 팔던 상품의 정가를 200원으로 고치고 '50% 할인'이라 표기한다든지,

인터넷 쇼핑몰에서 '최저가 정렬' 시 관련성 낮은 제품을 상단에 노출해 결국 '추천순 정렬'을 누르게 만드는 방식 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넛지는 마케팅 기획의 디테일을 완성하고,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하는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는 기법이다.


앞선 글에서 소개했던 피망 뉴맞고의 "사는데 은근히 힘이 됩니다"라는 캠페인 슬로건을 떠올려보자.

단순히 슬로건만 들으면 어떤 상황인지 잘 그려지지 않는다.

'맞고가 무슨 힘이 된다는 거지?'라고 의아해할 수도 있다.


첫 번째 장면(Scene)은 대중목욕탕이다.

조용히 목욕을 즐기고 싶었는데,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왁자지껄 목욕탕을 전세 낸 듯 떠든다.

짜증은 나지만 뭐라고 따지기도 애매한 상황.

이때 흐르는 서브 카피(Sub copy). "아, 집에서 맞고나 칠걸."

두 번째 장면은 평범한 사무실이다.

오늘도 상사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트집을 잡는다. 보고서를 퇴짜 맞고 자리에 앉은 김 과장.

그리고 흐르는 서브 카피. "얼른 집에 가서 맞고나 쳐야지."


두 장면 모두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는 모습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담백하게 카피로만 풀어냈고, 키비주얼(Key Visual)에도 고스톱 패나 게임 이미지는 넣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근히"라는 단어를 통해 맞고를 쳐야 하는 상황을 매우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사용한 단어는 "은근히"인데, 소비자는 "은근히" 연상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공감하고 게임을 떠올리게 된다.


이처럼 장면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여 연상을 유도하는 기법은 고도의 넛지 마케팅에 속한다.

상황과 맥락을 이야기함으로써 소비자의 공감을 유도하고, 제품을 직접 노출하거나 장점을 나열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캠페인 방식의 장점은 의외로 각인 효과가 뛰어나다는 점이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듯, 우리의 뇌는 무엇인가를 '회피'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듣기 싫은 이야기도 들리면 들어야 하고, 보기 싫은 것도 보이면 봐야 하며, 기억하기 싫은 것도 기억이 난다. 이제 이 글을 본 사람들은 대중목욕탕에 가면 피망 뉴맞고가 생각날 것이다.

아무 상관 없지만, 이 글을 읽었다는 이유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피망 뉴맞고 캠페인은 바로 이 지점을 자극했다.

"우리 게임은 다른 고스톱보다 재밌어요"라거나 "접속하면 혜택이 가득해요"라고 외치는 일반적인 화법이 아닌, 일상의 맥락 속에서 자연스럽게 브랜드가 생각나도록 유도한 것이다.

만나기 싫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집에서 그냥 맞고나 칠걸",

명절 친척들의 잔소리 속에서 "집에서 그냥 맞고나 칠걸".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일하던 2000년대 후반은 피처폰 시대라 모바일 게임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약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쉽게 맞고를 접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면, 광고 속 상황도 훨씬 다양하고 재미있게 표현해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마케터는 의도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늘 고민하는 직업이다.

마케팅 개론에 나오는 4P, 3C, USP, STP 같은 기본 개념들은 대부분 '직접적인 메시지 전달'을 전제로 한다. 반면 넛지는 '은근한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주류 이론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또한 넛지를 메인 전략으로 삼았다가 자칫 어색하거나 억지스러운 캠페인이 될 위험도 있어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고객의 행동과 연상을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넛지의 효과는 강력하지만, 마케터의 의도를 무리하게 숨기거나 반대로 어설프게 드러내면 소비자는 거부감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2021년 2월에 있었던 배달의 민족 "고마워요 키트" 이벤트가 대표적인 실패 사례다.

배민 이용자들에게 "기사님 고마워요"라고 쓰인 간식 가방을 나눠주는 이벤트였는데,

고객이 기사님을 배려하도록 유도하겠다는 기획 의도가 너무 투명하게 드러나는 바람에 거센 반발을 샀다.

"내 돈 내고 배달비 내는데 왜 기사님 간식까지 챙겨야 하냐"는 반응부터,

"배민이 챙겨야 할 복지를 소비자에게 떠넘긴다"는 조롱까지 쏟아졌다.

물론 자발적으로 기사님께 간식을 건네는 훈훈한 미담도 존재하지만, 이를 플랫폼이 나서서 억지스럽게 유도하려다 보니 고객과 기사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한 이벤트가 되었다.

결국 이 이벤트는 6시간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안 하느니만 못한, 마케터 입장에서는 최악의 결과였다.


다음 편에서는 은근슬쩍 스며드는 성공적인 캠페인 사례와 이에 대한 마케터의 고민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다뤄보겠다.


- 계속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은근히 힘이 되는 마케팅_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