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쪽이 마지노선이 아니었다

by 비꽃

요 며칠 몸이 조각조각 파편이 되어 깨지는 것 같은 아픔을 경험했다. 우간다에 와서 이렇게까지 감기로 고생한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힘들었다. 보통 아이들 방학 중에는 정한 루틴에 따라 생활하자 주의인데, 첫날부터 무너지니 극 대문자 J형 엄마인 나로서는 아픈 나를 살피기보다는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데…’라며 채찍질하기에 바빴다.


이런 와중에 참으로 감사했던 건 아이들의 행동이었다. 여느 방학이었다면 엄마를 수십, 수천 번 부르는 것으로 하루 종일 엄마, 엄마, 엄마였을 아이들이, 아픈 엄마를 찾기 대신 책을 들고 집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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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방학 기간 동안 각자 한 권의 책을 읽기로 약속한 것이 있었고, 시내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자는 것이 완독에 대한 보상이었다. 주안이가 택한 책은 [어린 왕자], 예주는 [로빈슨 크루소], 나는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인데, 나는 시작과 동시에 아파서 스무 장이나 읽었을까, 서론만 읽다 멈춘 상태였고 두 아이는 내가 누워있는 사이 다 읽어냈다. 글자 수도 적지 않아 “얘들아, 방학 기간에 읽는 거니까 천천히 읽어도 돼.”라며 시간이 필요하겠지 했는데 조용하다 싶으면 책 삼매경 중이었다. 이건 또 생각지 못한 전개방식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아이들은 마쳤고 아이스크림을 사주러 시내로 가야 하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다음은 책을 읽고 아이들이 남긴 말이다.


“처음에는 혼자 읽을 수 있을까 했는데, 몇 장 읽다 보니 재밌더라. 그리고 어린 왕자는 착해. 나도 어린 왕자처럼 착하고 순수하게 자라면 좋겠어.”(주안) / “읽을수록 재밌어. 무서운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괜찮더라.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 같은 용기를 낸다는 건, 나한테는 아직 어려워. 나는 집이 좋아.”(예주)


덧. 아이들이 읽어낼 수 있는 책의 양을 35쪽으로 마지노선을 그었던 나. 그래서 200쪽 분량의 책을 과연 소화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품었었다. 몸의 회복 속도가 빠른 편이었고 하루 이틀이면 원상태로 돌아왔기에 내 몸에 대한 어리석은 신뢰를 한 것과도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경험하게 된다. 아이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라고 있다. 전적인 부모의 수고로 자란다 여겨지다가도 아이들의 성장은 부모 이상의 돕는 손길이 있음과 마주할 때면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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