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 커피 한 잔 너머의 거리
우리 부부는 등산을 한다.
계절이 허락할 때면 산에 오르고,
겨울처럼 산이 멀어질 때는
대신 옛 추억이 남아 있는 장소들을
하나씩 다시 찾아간다.
이번 주말에는 성수동에 다녀왔다.
왕십리에 살던 시절, 성수동은 옆 동네였다.
나에게 성수동은
낡은 공장과 창고, 구두가게, 경마장, 공터 같은
조금은 거칠고 조용한 풍경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성수동은 내게
‘새로운 곳’이 아니라
이미 지나온 기억의 한 부분이었다.
요즘의 성수동은
바쁜 동네가 되었다고 들었다.
사람이 많고, 말이 많고,
무언가를 계속 증명해야 하는 동네.
천지개벽을 했다는 말에
가 본다, 가 본다 하며 미뤄 두다가
이번에야 그곳에 발을 디뎠다.
막상 가 보니
생각보다 더 정신이 없었고
사람은 정말 많았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조용한 구석들은
이미 중심에서 멀어져
외곽 어딘가에만 남아 있는 듯했다.
연무장길로 들어서자
팝업스토어 현수막이
정신없이 나부끼고 있었다.
의류와 구두, 향수와 가방, 화장품까지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
끊임없이 시선을 끌었다.
공장 같기도 하고
카페 같기도 한 공간들 사이로
사람들이 부대끼며 걸었다.
예전의 공장과 창고는
갤러리와 카페, 복합문화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붉은 벽돌 건물들은
과거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동네는
현대와 복고가 겹쳐진 채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서 있는 듯했다.
걷다 보니
이곳이 제2의 명동 같기도,
제2의 홍대 거리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에는
젊은이들과 외국에서 온 청년들이 가득했고,
이 공간은 더 이상
나의 이웃 동네라기보다
누군가의 목적지가 된 곳처럼 느껴졌다.
세계적인 기업들과
한국의 이름난 기업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한때 경마장이 있던 자리는
서울숲이라는 녹지와
고급 주상복합 단지로 바뀌어 있었다.
SNS에 올릴 사진을 찍는 사람들,
SNS를 통해 유명해진 맛집 앞에 선 긴 줄들은
이 동네의 현재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한때 가장 뜨거웠던 가로수길이 조용해지고,
성수동이 다시 사람들로 채워지는 모습을 보며
동네에도, 인생에도
각자의 흥망성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수동은 완성된 동네라기보다
아직 쓰는 중인 문장 같았다.
지워진 흔적 위에
다시 덧쓰는 글씨처럼.
새것과 오래된 것이
굳이 섞이려 애쓰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잠시 머물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람들 틈에 있었지만
남편과 나, 둘이서
조용히 걸을 수 있었고
그래서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오늘의 성수동은
나에게 무언가를 사게 하거나,
결정하게 하거나,
서두르게 하지 않았다.
내가 조금 더 젊은 청춘이었다면
이 거리는
많이 설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국밥으로 속을 데우고
동네를 조금 더 걸은 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돌아왔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오래 품고 있던 궁금증은 풀렸고,
추억으로 남아 있던 풍경들은
이제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오늘
이 동네를 충분히 보았고,
충분히 즐겼다.
이 시간에 감사했고,
더 바라지 않아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성수동은
다시 찾아야 할 곳이라기보다
지나온 기억 위에
조용히 놓아두어도 괜찮은
그런 동네로 남았다.
젊은 날의 감정은 아니지만
그만큼 무겁지도 않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이 정도의 추억 여행이
딱 알맞다.
다음에는 또
어디로 향하게 될지,
그것을
자연스럽게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