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버틴 자리들 [4장]
나는 실향민의 집에서 자랐다.
우리 집의 고향은 말이 아니라 침묵으로,
이야기보다 손과 생활로 남아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나서야
나는 우리 집의 가난을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 가난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손님이 아니었다.
늘 벽지처럼
삶의 뒤편에 붙어 있는,
지워지지 않는 배경의 색에 가까웠다.
엄마와 아빠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실향민이었다.
집안 어른들이 모여 이야기할 때면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그 말투 속에는
거칠고도 애틋한 시간들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함흥, 가 닿지 못한 고향
아빠의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이다.
내가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땅,
지도 위에서만 조용히 접어 두었던 이름.
그러나 우리 집 안에는 늘 함흥이 있었다.
아빠의 말속에,
술기운 섞인 한숨 속에,
가끔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보던 등 뒤에.
아빠는 전쟁통에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 길에서
아빠의 엄마를 잃었다.
이후 계모 밑에서,
배가 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자라야 했고,
그의 어린 시절은
고향뿐 아니라
어머니에게서도 멀어져 버린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그 이야기를 자세히 하지 않았다.
다만 어떤 밤에는 불쑥
“거기는 말이야…”로 시작해 끝을 맺지 못했고,
어떤 날에는 시장 냄새 앞에서,
낯선 바람 앞에서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 침묵 속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골목과 집,
어린 시절의 얼굴들,
그리고 아마도
부르지 못한 한 사람의 얼굴이
함께 들어 있었을 것이다.
함흥은 내게 풍경이 아니라 기척이다.
눈 덮인 길이었을지도,
바닷바람이 센 도시였을지도 모를 그곳은
아빠가 끝내 돌아가지 못한 자리로,
그리고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한 시간으로
겹쳐 남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고향’이라는 말은
우리 집에서는 늘 현재형이 아니었다.
이미 멀어져 버린 곳,
그러나 마음에서는 떠나지 못한 곳.
아빠는 유난히
물냉면을 좋아하셨다.
맑고 시원한 국물.
양념보다 육수 맛이 먼저 오는 냉면이었다.
그릇 안에서 가늘게 풀리던 면발을 보며
나는 그게 그냥 ‘우리 집 냉면’인 줄 알았다.
김치보다 무김치를 더 찾던
아빠의 젓가락이
그 맛이 어디서 왔는지 말해 주기 전까지는.
지금 생각하면,
아빠는 그 국물 속에서
돌아갈 수 없는 고향만이 아니라
부르지 못한 얼굴 하나까지
함께 넘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빠의 말투,
음식의 간과 취향,
괜히 버리지 못하던 낡은 물건들 속에서
나는 함흥의 조각들을 본다.
이름도 모르는 강 하나,
기억 속 장독대,
어쩌면 부르지 못한 누군가의 얼굴까지.
그 모든 것이 아빠를 통해
내 안으로 흘러왔다.
나는 함흥에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아빠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늘 그 근처를 서성인다.
닿지 못한 고향 곁에서,
그리고 아빠가 평생 놓지 못했던
한 사람의 그리움 곁에서.
사리원, 손으로 기억된 고향
엄마의 고향은 황해도 사리원이다.
엄마는 전쟁통에 엄마의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여섯 살에, 이남으로 내려왔다.
그 나이에 엄마는
고향도, 아버지도,
아직 가져보지도 못한 꿈까지
함께 두고 와야 했다.
다행히 할머니와 삼촌과 이모…
삼형제 모두 이남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후 엄마는
아주 이르게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하고 싶었던 것보다
해야 할 것들을 먼저 배워야 했다.
엄마는 춤과 노래를 좋아하셨다.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고,
음악이 나오면 몸이 먼저 움직이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 시간이 허락했다면 엄마는 예술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는 예술가가 되기 전에
장사꾼이 되었고,
무대보다 먼저
삶의 한복판에 서야 했다.
그래서 엄마는
부엌보다 시장에서,
노래와 춤보다 계산기 앞에 서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리원은 우리 집에서 늘 반쯤만 존재했다.
나는 엄마의 고향에 대한
자세한 위치도, 집의 모양도, 골목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엄마가 음식을 오래 붙잡을 시간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손이 빠른 엄마는
장사하는 틈틈이 시간을 쪼개
음식을 만들었다.
엄마가 부치던 지짐이,
된장에 조심스레 찍어 먹던 봄나물,
밀가루를 아끼듯 풀어 넣던 국.
특별한 설명은 없었지만
그 음식들에는 늘
어딘가의 들판과 바람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 맛이 ‘사리원 쪽’에서 왔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명절이나 손님 오는 날이면
엄마는 유난히 큰 만두를 빚었다.
손바닥만 한 만두를 하나 집어 들면
속이 묵직해 손에 무게가 느껴졌다.
두부, 숙주, 고기, 김치가 섞인 속을
투박하게 접어 올린 만두는 모양은 늘 조금씩 달랐고,
그래서 더 정이 갔다.
김이 오르는 찜통 앞에서
엄마의 손은 말이 없었고,
그 만두들은 우리가 듣지 못한
고향 이야기를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는 가끔 창밖을 오래 바라볼 때가 있었고,
비 오는 날이면 유난히 모든 일이 느려졌다.
그럴 때 나는
알 수 없는 방향을 향해
엄마의 시간이 잠시 멀어지는 걸 느꼈다.
아마도 황해도의 들녘,
저녁연기,
우물가의 소리 같은 것들.
말로 꺼내지 않은 장면들이
엄마 안에서 혼자 지나가고 있었을 것이다.
사리원에는 내가 모르는 마당이 있고,
엄마가 부르지 못한 이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결국
이야기보다 생활로 남았다.
밥을 지어야 했고,
아이들을 키워야 했고,
장사를 해서 하루를 넘겨야 했기 때문이다.
고향은 접어 두고, 오늘을 먼저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엄마와 아빠는
자기 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것이다.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꿈을 묻는 일은
허락되지 않은 사치였는지도 모르겠다.
돌아갈 수 없는 땅이었지만,
그들은 그곳을
버티는 방식으로,
침묵하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먹이고 재우는 방식으로
오늘까지 데리고 왔다.
그리고 나는
그 고향 위에서
자랐다.
이 글은 전쟁으로 고향을 잃고 남쪽으로 내려온 부모 밑에서 자라며,
내가 어떤 집의 공기 속에서 성장했는지를 기록한 글입니다.
아빠는 함흥에서 내려오다 어머니를 잃었고,
엄마는 여섯 살에 사리원을 떠나 삶의 한복판에 서야 했습니다.
두 분 모두 고향을 자세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침묵과 생활, 음식과 손의 기억으로 그곳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나는 그 집의 장녀로 가난을 먼저 배웠고,
말보다 하루를 먼저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글은 고향에 대한 정감 어린 이야기가 아니라,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삶의 방식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 위에서 자라난 한 아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어떻게 자신을 만들어 왔는지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 글을 통해 누군가의 삶에도 말로 다 하지 못한 고향이 있었음을,
각자의 침묵과 버팀 속에 이어져 온 시간이 있었음을
조용히 전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