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할머니가 있던 자리

마음이 버틴 자리들 [16장]

by 이도화
"방과 후 곧장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 곁을 지키던 시간들."

어떤 사람이 떠나고 나서야, 그 자리가 얼마나 컸는지 알게 된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던 해,
내 삶은 어느 날 갑자기 완만한 길에서 벗어나
가파른 비탈로 접어들었다.
성적도, 교실 분위기도 아니었다.
늘 집 안에 있던 외할머니의 몸이
눈에 띄게,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할머니는 어느 순간부터 혼자 일어나지 못했다.
이불을 걷어 올리는 일에도,
물 한 컵을 입에 대는 일에도
누군가의 손이 필요해졌다.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할머니를 돌보는 일을
자연스럽게 맡게 되었다.


하교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 곁에 앉았다.
집 안에는 늘 약 냄새와 오래된 이불 냄새가 섞여 있었다.
문을 열면 먼저 느껴지는 것은 온기보다
할머니의 체취에 섞인 습한 기운이었다.
방 안쪽에서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소리가
아주 가늘게 들려왔다.


화장실까지 천천히 부축하고,
젖은 이불을 말리고,
따뜻한 물을 받아 약을 타 드리고,
밤이면 할머니의 발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주물러 드렸다.


그 발은 늘 차가웠고,
내 손바닥에는 얇은 뼈의 윤곽이 그대로 느껴졌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일들은 ‘도움’이 아니라
내 하루의 순서가 되어 있었다.


피곤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간만큼은 마음이 조용해졌다.
할머니의 느린 숨,
부엌에서 끓던 보리차 소리,
창문 틈으로 들어오던 오후의 먼지 빛.
그 사이에 앉아 있으면
내 삶 어딘가에 아직 불이 켜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작지만 오래된 등불 하나가
방 한가운데서 숨처럼 흔들리며
나를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무렵, 나는 자주
할머니와 마주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다.
말없이 손을 만지작거리며
체온이 빠져나가지 않게 꼭 쥐고 있었다.


할머니의 손은 늘 마르고 따뜻했다.
손등에는 잘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이 있었고,
맥박은 내 손가락 아래에서
아주 천천히, 힘없이 뛰었다.


말은 거의 없었다.
할머니는 창밖을 오래 바라보다가
“춥지 않나…”
“배는 고프지…”
그런 말만 가끔 건네셨다.


어느 날은 내 손을 한참 쥐고 있다가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너는… 너무 애쓰면서 살지 마라.”


그때의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그저 “응” 하고 대답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짧은 문장은
할머니가 내게 남긴 마지막 보호 같았다.


세상이 너무 일찍 무거워질까 봐,
누군가 나를 너무 빨리
어른으로 밀어 넣을까 봐,
할머니는 그 말로
내 어깨를 한 번 더 덮어주고 가신 것 같았다.


노환은 멈추지 않았다.
나와 할머니는 더 이상 둘만 살 수 없게 되었고,
할머니는 이모 댁으로, 다시 삼촌 댁으로 옮겨 다니다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할머니의 부음 소식은 나에게 온몸으로 전해졌다.
속이 푹 꺼지는 느낌,
발밑에서 바닥이 비어버리는 감각.


어린 나에게 그 죽음은
‘이별’이라기보다
지탱하고 있던 무엇 하나가
소리 없이 빠져나가는 일이었다.


아버지를 잃었을 때의 슬픔이
텅 빈자리였다면,
할머니의 죽음은
나를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척추가
안쪽에서 조용히 무너지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날 이후
아침마다 들리던 기침 소리도,
부엌에서 나던 작은 그릇 소리도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사라졌다.


집 안은 너무 조용해서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와
벽시계 초침 소리만
사람 없는 집을 대신해
괜히 크게 울렸다.


할머니 상을 치르고,
나는 여전히 학교에 갔다.
교복을 입고, 책상 앞에 앉았다.


교과서를 펴고 앉아 있어도
내 안이 너무 비어 있어서
글자가 걸리지 않았다.


읽다가 멈추고,
멈춘 채로 있다가,
다시 읽는 척을 했다.


공부가 안 되는 이유를
나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한 채
그냥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때의 나는
슬프다기보다
속이 텅 빈 사람처럼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무언가를 붙잡고 싶어
계속 앉아 있었지만,
오래 앉아 있을수록
안쪽에서는 조용히 비어 가는 소리가 났다.


그즈음 나는 처음 알았다.
‘버틴다’는 일이
얼마나 많은 힘을 요구하는지.


밤이 되면
괜히 불을 끄지 못한 채 앉아 있다가
무심코 할머니가 계시던 쪽을 바라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책을 펼쳤다.


의지가 단단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를 떠나면
더 크게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나는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흔들리면서도
완전히 쓰러지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를
아주 조심스럽게 견디고 있었다.

✍️ 작가 노트

이 장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외할머니의 쇠약과 죽음을 겪으며 제 삶의 균형이 무너져 가던 시기를 기록한 글입니다. 하교 후 할머니를 돌보던 일상, 말없이 손을 잡고 앉아 있던 시간, 그리고 그 곁에서 느꼈던 묘한 평온은 제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정서적 안전지대였습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뒤, 집은 소리와 온기를 함께 잃었고, 저는 더 이상 마음을 기대어 둘 자리를 찾지 못한 채 학교와 책상 앞에 앉아 하루를 견디게 됩니다. 그 무렵의 저는, 왜 나에게는 이렇게 아픈 일만 일어나는지 하늘을 원망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글은 할머니의 부재를 통해 제가 처음으로 깊은 상실과 정서적 고립을 몸으로 통과하던 시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슬픔은 울음보다 먼저 생활의 리듬에서 나타났습니다. 교과서를 펴고 앉아 있으면 해야 할 일만 남고, 할 수 있는 일은 사라졌습니다. 상실은 그렇게 조용히 하루의 구조를 바꾸고, 저를 그 안에 남겨두었습니다.


이 장은 이후 이어질 ‘버팀’의 시간으로 들어가기 전, 제 삶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온기가 사라지던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그 뒤로 저는 한동안 앞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그 모든 시간이 시작된 곳이, 할머니가 있던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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