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아이의 엄마로 다시 시작한 비행. (16장)
그해 11월, 둘째가 세상에 나왔다.
사내아이였다.
아이의 눈망울은 유난히 또렷했다.
똘망똘망한 눈매에 얼굴선이 반듯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서
‘단정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게 이상했지만,
나는 아이를 처음 안는 순간 그렇게 느꼈다.
작지만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이의 태몽은 선명했다.
꿈속에서 나는
동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걷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해가 떠올랐고
이상하게도 그 빛이
조용히 내 품으로 스며들었다.
꿈에서 깬 뒤에도
가슴에 남은 온기가 오래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동녁의 근원’이라는 뜻을 한자로 옮겨 지었다.
해가 떠오르는 방향의 시작처럼
넓고 단단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이는 작고 야무진 아이였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누구나 한 번 보면
한 번쯤 안아 보고 싶어 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아이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무엇보다도
첫째가 동생을 몹시 좋아했다.
처음 아기를 보여주었을 때
첫째는 한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엄마, 얘 우리 아기야?”
그리고는 아기가 울 때마다
작은 손으로 등을 토닥이며
“괜찮아, 괜찮아” 하고 속삭였다.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동생을 대하는 마음만큼은
제법 누나 같았다.
동생이 태어나자
첫째는 자기 일을 더 야무지게 해냈다.
유치원 가방을 스스로 챙기고
신발도 가지런히 정리하고
내가 바쁠 때면
동생 옆에 가만히 앉아
아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이도
자기 나이보다 조금 일찍
자란 셈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탄생과 함께
내 삶에는 여러 변화가 한꺼번에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들이 태어난 지 일주일 되던 날
혼자 되신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오셨다.
며칠 머물다 내려가실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는
한 지붕 아래 살게 되었다.
그 무렵 남편의 회사는 긴축 재정에 들어갔다.
본사 영업 파트가 모두 지방으로 옮겨졌고
남편은 공장이 있는 현장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떨어져 살게 되었다.
남편이 없는 집에서
나는 어머니와 아이 둘과 함께 살게 되었다.
첫째를 낳았을 때는
남편이 북경으로 파견을 갔었다.
지역 전문가로 공부하러 떠난 것이었다.
둘째를 낳을 즈음에는
회사 사정으로
지방 현장 근무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아빠의 자리는 더 필요해졌는데
상황은 늘 그 반대였다.
그리고 또
복직할 시기가 되었다.
일과 육아를 동시에 붙잡고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시간이
다시 시작되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당뇨와 그 합병증을 앓고 계셨다.
어머니는 살림과 육아를 도와주시기보다
누군가의 도움과
병원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나는 아이를 돌봐줄 사람과
어머니를 간병할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공립유치원과 유아원의 도움을 받고
장거리 비행을 나갈 때에는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집에
든든한 작은 조력자가 하나 있었다.
첫째였다.
어린아이였지만
동생 기저귀를 가져다 달라 하면
쪼르르 달려가 찾아오고,
동생이 울면
“엄마, 아기 울어.” 하고 먼저 알려주었다.
아마도 그 시절
나는 첫째에게
생각보다 많은 것을 기대고 있었던 것 같다.
아이 둘을 낳고 복직한 나는
‘두 아이의 엄마로 복직한 제1호 승무원’이라는
타이틀을 또 얻었다.
나는 임신과 육아로 반복된 근무 공백,
주위의 시선,
그리고 스스로 느끼는 위축감 속에서
묵묵히 버텨야 했다.
동료와 선후배들의 눈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비행에 앞서
두 아이를 낳으며 붙은 군살과 나잇살을 빼야 했다.
운동과 식이요법을 병행해
목표 체중까지 감량했다.
바뀐 안전 매뉴얼과 서비스 매뉴얼을 다시 익히고
손과 눈에 익도록 동작을 반복해서 연습했다.
기내 방송도
입에 붙을 때까지 여러 번 읽었다.
승무원은
팀으로 움직이는 직업이다.
하지만 나는 임신과 육아 휴직을 반복하면서
특정 팀 없이
이 팀, 저 팀에 합류해 비행을 해야 했다.
복귀 후의 비행은 힘들었다.
예전 같지 않았다.
특히 밤을 새우는 야간 비행은
몸과 마음을 모두 지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함께 있기 위해
나는 일부러
서울 체류 시간이 길게 잡히는
강도 높은 비행을 신청했다.
남들이 꺼리던 최단기 유럽 노선,
독일 프랑크푸르트
2박 3일 일정이었다.
그 비행은
‘마루타 비행’이라 불릴 만큼
고된 근무였다.
모두가 꺼리는 비행이었다.
한 달에 두세 번
나는 그 비행을 자청했다.
그 비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사흘을 온전히
한국에서 아이들과 함께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생각에
나는 그 비행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알토랑 같은 두 아이를 두고
그 시절
나는 그 비행을 어떻게 해냈을까.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을 내가 어떻게 지나왔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이 시절은 IMF가 시작되던 때로,
회사와 가정 모두가 불안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남편과 떨어져 지내야 했고, 몸이 편치 않으신 어머니와 두 아이를 돌보며 다시 비행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내가 일을 나가는 동안 아이들은 함께 살던 연로한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의 손을 오가며 자랐습니다. 그 돌봄은 특별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 시절 우리의 삶을 이어가게 했던 한 방식이었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어린 첫째는 동생을 아끼며 작은 조력자가 되어 주었고, 저는 두 아이의 엄마로 다시 비행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스스로도 놀랍습니다.
아마도 아이들이 제 삶에 건네준 힘 덕분이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