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해진 스케줄 속에서, 다시 나의 시간을 생각하던 밤. (17장)
비행이 끝나고 호텔 방에 홀로 남겨졌을 때,
문득 낯선 고요가 밀려왔다.
창밖으로는 이국의 불빛이 번지고 있었지만,
그 화려함은 방 안까지 들어오지 못했고
내 안에서는 오히려 아주 작은 파문만이 일었다.
부산스런 소란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들리는,
그런 종류의 적막과 고요였다.
그 적막과 고요 속에서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몸은 이미 수많은 비행을 지나 여기까지 와 있는데,
마음은 이제야 제 속도를 찾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이 길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 걸까.
이 길을 지속하는 게 맞는 걸까.
이 길은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문장으로 꺼내면 단순한 질문들이었지만,
그 물음들이 내 안에서 만들어내는 무게는
생각보다 깊었다.
그 감각은
유년의 어둠 속에서
혼자 버티며 중력을 견디던 순간들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고요는
그때처럼 나를 움츠러들게 하지는 않았다.
어릴 적의 고요가
두려움과 불안의 다른 이름이었다면,
지금의 고요는
나를 시험하기보다는
차분히 다져주는 시간에 가까웠다.
도망치고 싶지 않았고,
현실을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호텔 책상 앞에 앉아
비행 스케줄표를 펼쳐놓았다.
다음 비행의 동선과 내 일정을
하나씩 따라가며
머릿속으로 시간을 가늠했다.
언제 출발하고
어디에 도착하고
얼마나 머물다 돌아오는지.
그 사이에 내 시간이 얼마나 남는지.
손끝에는 이미 정해진 칸과 숫자로 가득한
스케줄표가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이는
이상하게도 백지처럼 느껴졌다.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언가를 스스로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은.
그리고 그 선택이
이제는 내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은 많이 달라졌지만
집중하는 순간
세상과 나 사이에
조용한 거리감이 생긴다는 원리만큼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 속에 있어도 혼자가 되는 그 감각,
그 고요한 집중이
나를 다시 제자리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나는 다시 도약하고 싶었다.
다시 무언가를 더 배우고 다지고 싶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멀리 보고 싶었고,
지금의 나를 발판 삼아
스스로를 한 단계 더 확장시키고 싶었다.
그 생각은
막연한 욕심이라기보다
천천히 쌓여온 열망에 가까웠다.
물론 현실은 가볍지 않았다.
집에는 두 아이가 있었고,
병환으로 힘들어하던 시어머니가 계셨다.
나만 바라보는 친정어머니도 계셨다.
회사에서는 사무장으로서의 책임도 있었다.
그래서 그 생각은
쉽게 꺼낼 수 있는 종류의 결심이 아니었다.
그 종이를 바라보던 순간
하나의 생각이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다시 공부해 보자.
대학원에 가자.
머릿속에서 그 말이
또렷하게 형태를 갖추어 밀어내기 시작했다.
목표가 정해졌다.
H 대학교 호텔·관광 서비스학과 석사 과정.
하늘 위에서 몸으로 익혀온
서비스의 세계를
단순한 기술이나 경험으로 남기기보다,
언어와 구조를 가진 지식으로
이론화하고 논리로 정리해 보고 싶었다.
체험을 지나
이해의 자리로 옮겨가고 싶었다.
그날 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결심했다.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앞으로의 시간을 더 알차게 살아가자고.
더 단단한 기준을 가진 사람으로,
흔들리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를 준비시키자고.
다음 날 새벽,
픽업 시간이 되어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이른 아침의 공기는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 빛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알았다.
하늘을 나는 일은
나를 세상으로 데려가는 여정이면서
동시에
나를 다시 나에게로 돌려보내는 과정이기도 했다는 것을.
기울던 유년을 지나고,
접어야 했던 꿈들을 지나
마침내 열리던 문 앞을 지나
하늘을 날며 나를 지키고 키우던 나는,
그날의 고요 속에서
다시 한 번
다음 문을 향해
걸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글은 주니어 승무원으로 비행을 시작해 시니어를 거쳐
부사무장과 사무장으로 이어지던 시절에 기록한 글입니다.
비행 경력으로는 10년을 넘긴 때였고, 여러 단계를 지나
업무와 삶의 리듬이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아가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 시기의 저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며느리, 딸, 아내였고
회사에서는 여러 후배들을 책임지는 사무장이었습니다.
여러 역할 속에서 하루하루는 분주했고 삶은 늘 빠듯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할들에 머무르기보다
다음 단계의 자신을 조용히 준비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비행을 이어가던 삶 속에서도
무언가를 더 배우고 채우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은 어느 순간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결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