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방에서 바뀐 방향
홍콩은 집값이 비싸도 너무 비쌌다.
해외에서 월세로 살면서 굳이 크고 좋은 집에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키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집은 소박했다.
넓지 않은 거실에는 화려한 가구도, 눈길을 끄는 장식도 없었다.
대신 사방을 책으로 채웠다.
벽면을 따라, 바닥을 따라, 테이블 위까지
우리 가족이 읽고 싶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집이 작다 보니
거실은 자연스럽게 도서관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치우게 되었고,
다시 들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활자를 가까이했다.
특별히 독서를 강요한 적은 없었지만
집 안의 공기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내성적인 사람이다.
해외에 살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더 즐기게 되었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도,
남의 이야기를 오래 듣는 것도,
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홍콩 생활 속에서도
화려한 사교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처음에는 외로움이었지만
점점 혼자 있는 법을 배워 갔다.
읽고, 생각하고, 적는 시간이
일상이 되었다.
아이들 곁에서 나 역시 늘 책을 펼쳤다.
영어를 공부하고, 한국어 수업을 준비하고,
조용히 일기를 썼다.
지금 돌아보면
그 작은 집은 우리 가족의 방향을 정해 준 공간이었다.
홍콩의 아파트에는 아주 작은 방이 하나 있다.
원래는 가사도우미를 위한 공간이다.
나는 그 방을
내 공부방으로 바꾸었다.
책상 하나, 스탠드 하나,
그리고 빼곡한 책들.
그 방에 들어가면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 들었다.
조용하고, 아늑하고, 밝은 공간.
그곳에서 나는
내 생애 가장 열심히 공부했다.
방이라기보다
작은 골방에 가까웠다.
창도 크지 않았고
책상 하나 놓으면 공간이 거의 차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방에 들어가면 마음이 편해졌다.
아늑한 기운 덕분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 방은
나의 전용 공간이자 아지트였다.
그곳에서 나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 인생의 방향은
거창한 결심으로 바뀐 것이 아니었다.
작은 방에서
책을 읽고, 컴퓨터를 켜고 강의를 듣고,
수업을 준비하고, 글을 쓰고, 명상을 했다.
그 조용한 시간들이
나를 바꾸고 있었다.
홍콩에서 대학 강의를 시작한 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나 역시 한국어학을 더 깊이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2008년 가을,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온라인 한국학 석사 과정이었다.
마흔 중반의 나이에
다시 학생이 되었다.
공부는 놀라울 만큼 재미있었다.
그 무렵
아이들은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는 결과에 더 마음이 쏠려 있었다.
성적, 친구 관계, 학교에서의 평가.
잘하고 있는지,
뒤처지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나의 자리를 조금씩 찾아가면서
기준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무엇을 이루고 있는지보다
어떤 태도로 하루를 살아가는지를 보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시험 결과부터 묻고 채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말을 아끼고, 그저 함께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이미
각자의 방식으로 잘 자라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아이들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달라진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조급함이 조금씩 사라졌고
기다리는 시간이 덜 불안해졌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무언가를 채워 넣는 일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을 믿어 주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믿음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전해진다는 것도.
그해 내 일기장은
공부와 수업 일정으로 빼곡했다.
시간 단위로 해야 할 일을 적고
하나씩 지워 나갔다.
아마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시간일 것이다.
분초를 아껴 수업을 듣고, 논문을 쓰고,
강의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챙겼다.
남편은 여전히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가정의 중심을 지켜 주었기에
나는 그 안에서 마음껏 성장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는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 알게 되었다.
내 인생의 방향은
큰 결심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작은 방에서 보낸
조용한 시간들 속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