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천천히 달릴 때

봄날의 차창 밖 풍경을 따라가며

by 미니어드


출발 전 플랫폼에서

기차역 플랫폼에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비행기를 탈 때의 긴장감과는 다르고, 버스를 탈 때의 무심함과도 다르다. 어딘가로 떠난다는 설렘과, 기다린다는 여유로움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 서울역 플랫폼에 서서 전광판에 뜨는 출발 시각을 확인할 때, 비로소 여행이 시작된다는 실감이 난다.


올봄에는 기차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코레일 기차여행 할인 정보를 미리 확인해두니 생각보다 저렴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KTX 특가를 잡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편도 3만 원대도 가능하다. 비행기보다 느리지만, 그 느림이 오히려 여행의 일부가 된다.



차창 밖의 계절

기차의 가장 큰 매력은 차창이다. 비행기 창밖은 구름뿐이고, 자동차 창밖은 도로뿐인데, 기차 창밖에는 풍경이 흐른다. 도시를 빠져나가면 논밭이 펼쳐지고, 터널을 지나면 산이 나타나고, 다시 평야가 열린다. 봄이면 그 풍경에 색이 입혀진다. 연두색, 연분홍색, 노란색.


봄에 가볼 만한 국내 여행지를 찾아보면 꽃과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진해의 벚꽃, 제주의 유채꽃, 광양의 매화. 기차를 타면 이 중 상당수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도 기차 여행의 장점이다.



목적지보다 과정이 좋았던 여행

작년 봄에 강릉행 KTX를 탔다. 목적은 바다를 보는 것이었는데, 정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가는 길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해 원주를 지나고, 산악 구간에 들어서면 터널과 교각이 반복된다.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산골짜기의 풍경이 압도적이었다.


도착지인 강릉도 좋았지만, 기차 안에서 보낸 두 시간이 여행의 절반이었다. 이어폰도 끼지 않고, 책도 펴지 않고, 그냥 창밖을 보았다.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요즘처럼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시대에, 그냥 앉아서 밖을 보는 시간은 사치 같으면서도 필수적이었다.



벚꽃을 보러 가는 길

봄 기차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벚꽃이다. 기차역 주변에 벚나무가 줄지어 있는 곳이 많아서,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꽃 터널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속초의 벚꽃 명소와 개화 시기를 확인해보면, 대략 4월 초중순이 절정이다. 동해안 쪽은 서울보다 조금 늦게 피니까, 서울에서 벚꽃을 놓쳤다면 속초행 기차를 타면 된다.


제주도는 기차로 갈 수 없지만, 제주도 봄 여행 추천 코스를 보면 벚꽃과 유채꽃, 오름까지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루트가 잘 정리되어 있다. 기차 여행이 좋다고 해서 꼭 기차로만 다닐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이동의 과정을 즐기려는 마음가짐이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여행의 끝은 늘 돌아오는 길에 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가는 길과 풍경이 같은데도 느낌이 다르다. 해가 지는 방향이 바뀌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마음이 한 겹 더 차분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기차는 천천히 달릴 때가 좋다. 속도가 줄어들면 풍경이 또렷해지고, 생각할 시간이 생기고, 다음 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올봄에 한 번쯤은 기차표를 끊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목적지는 어디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차창 밖에 봄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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