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전역 앞둔 말년의 고백

by 천비단

새벽녘의 공기는 축축하면서 무겁다. 나는 불편한 방탄조끼를 입고 총기를 어깨에 멘 채 걸어갔다. 총기를 메고 이동할 때에는 두 손으로 총기를 파지해야 하지만, 나는 그런 거추장스러운 규정 따위 무시한 지 오래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지 않은가. 나는 두 손을 주머니에 푹 찔러넣어 새벽공기를 피하며 초소를 향해 걸어갔다.


초소는 1평도 안 될 정도로 좁았다. 그곳에 군장까지 찬 성인 남성 2명을 밀어넣으니 더 좁게 느껴졌다. 나는 자리에 서자마자 테이블에 총기를 내려놓고, 방탄헬멧을 벗었다. 전입 오고 처음 받을 때부터 턱 버클이 고장나 고개를 30도 이상 돌리면 풀리는 놈이었다. 차라리 벗는 게 마음 편하다. 초소까지 온 이상 걸리기도 쉽지 않다.


같이 온 후임은 가만히 있질 못했다. 괜히 야간등 스위치를 딸깍거리기도 하고, 출입문을 여닫기도 하고, 쓰잘데기 없는 질문도 한다.


“ㅇㅇ 병장님은 전역하면 뭐 하실 겁니까?”

으레 군인들은 서로 미래 계획을 묻는다. 그래봤자 비슷한 얘기만 한다. 대학 복학할 거다, 여행 갈 거다, 뭐 해먹고 살지 모르겠다…. 끽해야 20대 초에 불과한 남자애들이다. 거창한 미래 설계보다 여자 아이돌 직캠 따위가 더 중요한 나이다.


문제는 나는 20대 초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나는 우리 부대에서 나이가 가장 많았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임용고시를 재수하고 떨어진 뒤 입대했다.


26살.


전역하고 1달 반이 지나면 27살.


이십 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나는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여행을 갈 거다, 맥북을 살 거다 따위 말로. 후임은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대답을 듣고는 재미없다는 듯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초소 구석에 말라붙은 벌레 시체와 찌그러진 생수병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지난 번에는 침대에 누워 게임을 하고 있는데 단톡이 울렸다. 친구가 회사 불평을 하는 내용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맞장구치며 본인 회사의 불만을 자랑하듯 쏟아냈다. 나는 대화에 낄 수 없었다. 내가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주제였으니.


몇 달 전에는 대학 동기 단톡에 초대되더니, 한 동기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동기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축하를 보내더니, 이참에 한 번 모이자는 대화가 오갔다. 나는 채팅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스마트폰 알림에 한줄씩 갱신되는 내용을 보면서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나는 99+가 떠 있는 채팅방의 알림을 껐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사회에 나아가 점차 자리잡아간다. 열심히 사회생활하며 돈을 벌고 있다. 비록 힘들고 지치는 일이 있을지언정 묵묵히 견디며 바람직한 사회구성원이 되어 간다. 그런데 나는 왜 새벽 5시에 방탄조끼와 방탄헬멧과 K2 소총을 메고 좁아터진 초소에 서서 동태 눈깔로 졸음과 씨름하고 있을까. 왜 나만 정체되어 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여주인공 나오코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몰라. 스무 살이 되도록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것에 대한 벌."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남자친구가 죽고나서, 정신병에 시달려 요양원에 온 자신의 처지를 두고 한 말이다.

나는 이 말에 공감했다. 어른이 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을 건너뛰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큰 깨달음을 얻고 어른이 되지 않는다. 살다보니 어른이 된다. ‘어른’에게 기대하는 정신적 성숙이나 지혜는 시간이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껍데기만 어른이고, 내부에는 어린아이의 습성이 남아 있다.


나는 그 벌을 치르는 중일까. 꿈을 이루기 위해선 그에 걸맞는 노력과 대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로 인해 철저하게 실패했다. 성장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된 벌을 받고 있다. 열심히 살아가는 친구를 보며 열등감을 느끼고, 방향을 잡지 못하여 방황만 하는 고통을 겪고 있다.




후임의 그 질문이 내 진로에 관한 질문이었다면, 나는 안타깝게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내 진로에 대해 정해둔 게 하나도 없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을지, 애초에 내가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학창시절 내내 지켜왔던 꿈을 포기한 순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패배자가 되어 있었다. 1년 반이라는 시간을 군대에서 보냈지만 나는 바뀐 게 없다. 자격증을 따지도 못했다. 공부를 하지도 못했다. 글을 많이 쓰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의미 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나는 여전히 한심하다.



이제 전역이 한 달 남짓 남았다. 나는 말출 휴가를 나왔다. 집에 돌아오자 군대에서는 애써 잊고 있었던 우울과 불안이 매일 찾아온다.




꿈에 실패한 자에게 어울리는 형벌일지도 모르겠다.


image.jpg <새벽초소>, painted by Grok



keyword
작가의 이전글군대에서 손으로 소설 쓰는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