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이더라도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는 걸 알지만

by 천비단




‘노력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라는 말은 MZ들이 학창시절 어른에게 가장 지겹게 들은 거짓말이 아닐까 싶다. 공부를 못해도, 운동을 못해도, 그림을 못 그려도, 노래를 못해도, 어른들은 어린 아이에게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깨닫는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세상에 얼마든지 많다는 사실을. 노력도 배신한다는 진실을.






마이클 센델, <공정하다는 착각>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센델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은 능력주의를 비판한다. ‘능력이 좋으면 성공한다’는 능력주의는 더 이상 공정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를 분열시키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개인의 성공에는 통제할 수 없는 환경적, 시대적 운이 매우 큰 영향을 끼치는데, 능력주의는 이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했다고 믿으며, 실패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실패했다고 착각한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는 믿음이 패배자들에게 가혹한 폭력으로 다가온다.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 사실 누구나 알고 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개인 공부방에서 개인 과외를 받는 학생과, 흙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밥 한 끼 먹는 것조차 허덕이는 학생. 둘 중 누가 공부를 잘하겠는가? 한국은 의무교육제도이니 둘 모두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진 것은 맞다. 하지만 기회만 주어졌을 뿐, 그 기회를 활용할 여건은 명백하게 다르다. 같은 트랙에서 뛰지만, 출발선이 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다’라는 거짓말 때문에 우리는 능력주의의 함정에 빠진다. 금수저 학생이 흙수저 학생보다 더 노력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다른 학생들이 학교 끝나자마자 피시방으로 달려가 롤을 조질 때, 어떤 학생들은 학원, 과외에 시달려 자는 시간 빼고 대부분을 공부했을 테니. 성공한 사람들이 노력을 안 한 건 아니니 ‘노력의 거짓말’은 쉽게 깨지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은 공정하지 않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음에도, ‘노력만 하면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MZ세대를 분석하는 논문이나 칼럼을 보면 항상 나오는 키워드가 있다. 바로 ‘공정성’이다. MZ세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바로 ‘공정성’이라고 한다. 입시 비리, 취업 비리에 불 같이 화를 내는 게 바로 이 ‘공정성’이 침해받았다고 생각해서라고 한다. 나는 이런 글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는 동의하면서도, 고개가 갸웃해질 때가 많다. 어쩐지 핀트가 살짝 엇나간 느낌이 든다고 할까.


MZ들은 노력해도 안 된다는 무력감을 학습했다. 의사 부모님 아래에서 태어나 한 달에 백만 원 이상을 학원비에 태우는 친구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문제집 한 권 사는 것조차 어렵게 허락을 구해야 하는 자신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안다.


노력은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노력을 우습게 뛰어넘는 요소는 얼마든지 많다. 세상은 불공정하다. 어른이 숨기고 싶어하던 이 사실을 이젠 우리는 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잔인한 사실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고 싶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나는 이 말 말고는 정확히 설명할 방법을 모르겠다.


MZ들이 강조하는 공정함은 ‘기계적 공정’이다. 시험 성적이 어떻게 나오는지, 입시나 취업이 어떤 과정을 통해 결정되는지 투명하게 공개되길 원한다. 자신이 이룬 성과에 따라 알맞은 보상이 지급되길 원한다. 인맥이나 혈연 따위로 특혜를 누리는 사람이 없길 바란다.


딱히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발을 들여야 할 분야에 있어 내가 불이익을 당하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공정함을 원한다. 어렸을 때 지겹도록 들은 그 말, 이제는 허울뿐인 거짓말이었다는 걸 깨달아버린 그 말, ‘노력하면 할 수 있다’라는 그 말이 진실이기를 간절히 희망하는 것이다.


최소한의 공정이라도 지켜져야 희망이 있다. 공정성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안전 장치다. MZ가 바라는 공정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내 생존을 위협하지 않는 기계적, 절차적 공정. 그래서 MZ는 세상이 불공정하단 사실을 알면서도 죽도록 공부하고, 야근수당을 요구하고, 특혜 의혹에 화를 낸다.


<기울어진 운동장>, painted by Grok


세상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사실은 안다. 흙수저는 금수저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 운동장의 ‘심판’조차 매수된 상황이라면, 흙수저인 내가 성공할 가능성은 아예 사라진다. 그것만은 인정하기 싫다. 이 절벽과도 같은 운동장에서 죽도록 노력해서 능력을 키우면 어찌어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


불공정함을 인정하면, 세상이 모두 ‘운’과 ‘사회적 환경’만으로 결정된다고 인정하면, 그 순간 나는 ‘노력했지만 실패한 패배자’가 아니라 ‘애초에 삽질만 한 바보’가 되어버린다. 그런 바보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공정함 때문에 실패했더라도, 내가 청춘을 바쳐 피땀 흘린 노력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세상은 공정하다고 믿는 것이다.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그리고 자위한다. 내 노력이 부족해서, 내 능력이 부족해서 실패했다고.


공정성에 대한 믿음은 일종의 방어기제다. 내가 성공한 것은 ‘내가 잘나서 성공한 것’이고, 당신이 실패한 것은 ‘당신이 못나서 실패한 것’이다. 공정하다고 믿으면 이 간단한 명제가 성립한다. 불합리한 세상과 사회구조를 탓하기보다, 모든 성공과 실패를 개인의 능력 탓으로 돌리는 것이 편하다.


사실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면? 내가 실패한 이유가 노력이나 능력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 때문이었다면? 그러면 내가 뭘 할 수 있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차라리 내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게 속 편하다. 세상은 공정한데 내 노력이 부족했다고. 그래야만 살 수 있다. 기성세대의 노오력 가스라이팅은 어느 정도 효과적이었는지 모르겠다.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을 오만으로, 패자들은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

- 마이클 센델, <공정하다는 착각> 中


나는 생각한다. 내 실패는 내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었을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요인 탓이었을까. 거울 속의 나를 본다. 내 노력이 부족했다고 좌절하는 나와, 사회구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분노하는 나 둘 중 누가 더 한심해 보일지. 어른들의 말씀대로, 세상은 참으로 공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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