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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Sep 10. 2021

210906

“…그러니까 사람들은 우울을 나쁘게만 인식한다는 거죠. 직관적으로 나쁘다고 느끼고, 실제로 나쁜 영향을 끼치니까.”


“그쵸.” 나는 흰 종이에 그어진 빨간색 글씨를 멍하니 쳐다보며 대답했다.


“하지만 한약을 생각해봐요. 한약은 쓰죠? 직관적으로는 나빠요. 하지만 한약을 왜 먹어요? 건강에 좋으라고 먹는 거잖아요?”


“네.”


“게임은 어때요? 재밌죠? 하지만 몸에는 나쁘죠.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죠? 똑똑하니깐.”


“네, 뭐.” 나는 ‘당신의 말에 반박하지 않겠다.’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울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해요. 몸에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우울을 받아들이고 다루는 법을 깨달아야 해요. 그래야만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어요.”


의사 선생님은 계속해서 A4에 알아보지 못할 글씨를 써내려갔다.


“…하지만 대체 우울을 어떻게…”


“알아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많은 환자들이 질문해요.” 의사 선생님은 내 말을 끊고는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제가 무언가를 알려준다고 해서 좋을 게 없어요. 지식으로 받아들이잖아요. 지식이 아니에요. 본인이 스스로 느껴야지.”


“네.”


“그냥 우울한 것만 없애줘요 하면은 항우울제 더 쌘 거 주고 끝이지. 그러면 나도 더 편해요. 그러길 원해요?”


“아뇨.”


“본인이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아야만 근본적인 치료가 가능해요. 항우울제로 우울함 없애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쵸?”


“…네.”


“성향이 그래 보여요. 모든 걸 완벽하게 하려고 하는.”


“네. 맞아요.”


“그것 때문에 우울해질 수 있거든요. 우울의 원인이라는 게.”


“완벽하려고 하는 것 때문에요?”


“예예. 뭐 어릴 때 가정에서 특별한 일 있었어요? 남들이 경험하지 못할 일이나 그런 거? 없었죠?”


“남들이 경험하지 못할 일이요?”


“예예. 뭐 있었어요?”


“…어릴 때, 초등학생 때였나. 아빠가 엄마를 칼로 죽이려고 했어요.”


“칼이요? 그 진짜 칼?”


“네. 식칼이요.”


“아니… 어머니는 어떻게 됐어요?” 의사 선생님은 꽤 당황한 듯 보였다.


“찌르기 직전에 그만둬서요. 칼 바닥에 집어 던지고, 집을 나갔어요.”


“아버지는?”


“아빠는 뭐… 기억 안 난다고 하고.”


“…지금은 어머니랑 아버지랑 같이 살고 계시죠?”


“아뇨. 따로 살아요. 아빠는 회사 기숙사에 살아서….”


“그날 이후로 우울증이 시작됐나요?”


“어… 잘… 모르겠네요. 아마 그러지 않을까요?”


의사 선생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음… 그… 네. 어릴 때 그런 일이 있어서… 힘들었겠네요. 하지만….”


이 이후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놀랐던 건 내가 이 경험을 얘기하면서도 울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덤덤하게 그냥 말했다. 일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성장한 걸까. 아니면 그냥 익숙해진 걸까. 잘 모르겠다. 멜라토닌제가 두 배로 늘었다. 새벽이 되니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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