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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Sep 25. 2021

돈까스

어릴 때 동네에 돈까스 집이 하나 있었다. ‘하늘돈까스’라는 이름이었다. 등심돈까스에 오천 원, 치즈돈까스에 오천오백 원이었다. 전단지를 보고 전화기 숫자를 꾹꾹 누른 다음에 ‘돈까스 주세요’라고 말하면 삼사십 분 후에 랩에 감싸진 큼지막한 돈까스칼, 포크, 숟가락, 젓가락이 왔다. 칼로 쓱쓱 돈까스를 썰어 먹은 뒤, 다 먹은 그릇과 수저를 비닐봉투에 담아 묶어 현관문 밖에 내놓았다. 하늘돈까스는 부모님의 도움 없이 배달을 시켜먹었던 유일한 음식점이었다. 하늘돈까스는 몇 년 안 가 사라졌다. 오랜 세월 동네 한 자리를 지켜온 음식집이었는데. 뭐, 생각해보면 나도 하늘돈까스는 자주 시켜 먹진 않았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너무나도 맛있는 배달 음식이 늘었다. 확실히 돈까스는 치킨 피자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놈이었다. 하지만 하늘돈까스가 사라지자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 먹지도 않으면서 문 닫는 건 싫다니.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다.


요즘 돈까스는 가격이 만 원 정도는 쉽게 웃돈다. 분명 분식집에서 애들이나 먹는 음식이었는데, 그 애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고 나니 고급 음식이 되었다. 부모님 세대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일일 것이다. 고깃덩이를 얇게 펴서 기름에 튀긴 음식이 어떻게 만오천 원이나 받아먹는지. 요즘 애들은 돈 아까운 줄 몰라. 그 돈이면 국밥이 몇 그릇이야. 에잉 쯧쯧….


그러나 지금의 돈까스는 비싼 가격을 받을 만하다. 옛날 돈까스는 모두 경양식 돈까스였다. 돼지고기를 망치로 쾅쾅 두들겨 넓게 핀 다음, 튀긴 돈까스 위에 소스를 듬뿍 뿌려서 손님에게 나간다. 고기 두들기는 법, 빵가루 묻히는 법, 타이머로 시간을 재면서 고기를 튀기는 법, 소스 뿌리는 법만 알면 누구나 돈까스를 만들 수 있었다. 오늘날 자주 보이는 돈까스는 일본식 카츠다. 고기를 얇게 피는 게 아닌, 두꺼운 고기를 그대로 튀긴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썰어서 손님에게 나간다. 또한 소스도 카츠 위에 뿌리지 않고 종지 그릇에 따로 나간다. 두꺼운 고기를 통째로 튀기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조리하면 고무마냥 질겨진다. 소스를 뿌리지 않기 때문에 소스에 대한 의존도도 떨어진다. 따라서 카츠는 요리사의 실력에 따라 퀄리티가 천차만별이다. 애들이나 먹는 음식이 아닌 진짜 고급 음식이다.


밥심의 민족은 이 카츠를 더욱 발전시켰다. 경양식 돈까스를 만드는 것처럼 고기를 망치로 쳐서 넓게 핀다. 그리고는 그 고기를 공처럼 만다. 가운데 빈 공간에 치즈를 가득 채워 넣는다. 그냥 돈까스 위에 모짜렐라 치즈를 뿌리던 과거의 치즈돈까스가 아닌, 치즈를 속 안에 품은 진정한 치즈 카츠이다. 여기에 더불어 고구마 무스까지 넣으면? 궁극의 고구마 치즈 돈까스, 고치돈이 완성된다. 내가 자주 가는 카츠 집에서는 카츠를 잘라서 주지 않는다. 내가 직접 칼로 썰어야 한다. 카츠를 반으로 가르면 고구마치즈가 넘쳐흐른다. 쭈욱 이어지는 치즈를 포크로 휘휘 감아 소스에 살짝 찍어 한입에 넣으면… 끝장이다.


사실상 경양식 돈까스와 일본식 카츠는 다른 음식이다. 이는 홍보에서도 알 수 있다. 경양식 돈까스 크기를 광고한다. 얼굴보다 큰 돈까스니, 왕돈까스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중국집에서 쟁반 그릇을 빌려와서는 두께가 초박피형 콘돔마냥 얇은 유사 돈까스가 자리를 차지한다. 아니, 쟁반돈까스니 뭐니 하더니 쟁반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인가? 던지면 존나 잘 날아갈 것 같은데 원반에 더 가깝지 않나? 쟁반돈까스는 쟁반짜장 표절 같으니 앞으로 원반돈까스라고 부르자.


일본식 카츠는 맛으로 승부한다. 부드러운 고기와, 기름이 줄줄 흐르는 치즈, 느끼함을 잡아주는 달콤한 고구마, 입천장이 까져 피날 정도로 바삭한 겉표면까지. 나는 처음 가는 음식점에서 돈까스를 처음 먹을 때, 소스 없이 고기의 맛을 맛본다. 소스 맛에만 의존하는 집은 고기가 더럽게 맛없다. 그런 집은 거른다. 진정한 카츠 맛집은 고기만으로 맛있다. 소스는 어디까지나 선택사항이다. 카츠에 소스가 뿌려지지 않고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근본 없는 원반돈까스 따위가 감히 넘볼 상대가 아니다. 저딴 원반과 카츠가 같은 돈까스라는 이름으로 묶인 현실이 비통하다. 야만인 같은 것들. 저놈들은 탕수육도 소스를 부어 먹을 게 분명하다. 예의범절도 없는 반사회적인 것들. 니들은 튀김 먹을 때도 간장에 찍어먹지 말고 부어먹어라


…분명히 돈까스에 대한 추억을 쓰려고 한 글인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글을 끝내긴 끝내야 하는데. 어… 한국인이라면 카츠 먹읍시다. 우리 아이 술안주 우리 남편 영양간식으로 좋은 돈카츠. 오늘도 뜨끈한 국밥으로 배를 채우려는 당신, 언제까지 국밥충이란 오명을 달고 살 겁니까? 오늘 하루 정도는 국밥 대신 돈카츠를 시켜보면 어떨까요? 싫음 말고.


2020년 6월 2일, 고구마돈까스와 등심돈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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