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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우 에디터 Oct 31. 2022

"추하다"는 비난에도 색깔 독점한 예술가의 결말

아니쉬 카푸어와 반타블랙

쿠사마 야요이 © Design Land Nyc
이브 클라인 © Yves Klein Official Website


예술가들은 종종 시그니처 컬러를 활용해 자신을 브랜딩 합니다. 쿠사마 야요이는 빨간색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을 뒤덮고 다니고, 이브 클라인은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IKB)'라는 색을 만들어 특허를 내기도 했죠. 아니쉬 카푸어에게는 두 가지 시크니처 컬러가 있습니다. 피처럼 어두운 검붉은 색과,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블랙인 반타블랙이죠. 오늘은 카푸어의 흑역사, 반타블랙 사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니쉬 카푸어의 반타블랙 집착

반타블랙을 활용한 본인 작품 옆의 카푸어 © The Guardian

가장 이슈가 된 카푸어의 시그니처 컬러는 '반타블랙 VantaBlack'입니다. 이 컬러 때문에 카푸어는 한동안 미술계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했죠.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2014년,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색상이라 불리는 반타블랙이 만들어집니다. 이 색상은 영국 제조회사인 Surrey Nano Systems에서 군사, 우주항공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어요. 그간 검은색은 여러 색깔을 섞어 만들어, 눈으로 보기엔 블랙이어도 빛을 비추면 갈색빛이나 푸른빛이 보이는 등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2014년, 영국에서 '가장 완벽한 검은색'을 만들어 낸 겁니다.


제작 목적은 군사, 항공 기술에 활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반타블랙은 빛을 99.965% 흡수할 뿐만 아니라, 가시광선과 적외선까지 흡수해 내는데요. 이 덕분에 인공위성의 위장용 도료로 사용되거나, 천체망원경의 내부 도색용 도료로 사용되는 등 다양한 기술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타블랙의 제작 과정에서, 카푸어가 소식을 듣고 투자에 참여하죠.


반타블랙으로 칠해진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 © Artnet News

가장 어두운 블랙(Blackest Black)이라 불린 반타블랙. 카푸어는 개발 연구에 돈을 투자했고, 동시에 예술가 중에서 본인만 사용할 수 있도록 독점계약을 맺습니다. 정확한 금액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거금을 들여 계약했다고 알려졌죠. 카푸어는 본인과 가까운 지인만 반타블랙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합니다. 기존에 반타블랙 안료를 구매하거나 소지한 개인, 기업의 안료를 모두 압수했고요.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예술계에서는 엄청난 비난이 뒤따랐습니다. 미술사에서 단 한 번도 한 명의 예술가가 재료를 독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이브 클라인과 그의 작품'Untitled Anthropometry', 1960 © Sotheby's
2019년 공식 판매를 시작한 IKB © Artnet News


물론 비슷한 사례가 있긴 했습니다. 이전에 이브 클라인은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 International Klein Blue'라는 컬러를 만들어 1960년에 특허를 낸 적 있죠. 하지만 2008년에 소더비 경매로 이 물감을 판매했고, 2019년부터는 클라인의 90번째 생일을 기념, 리터당 100달러에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누구나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를 구매할 수 있게 된 것이죠.

하지만 카푸어는 달랐습니다. 예술 작품에 사용할 목적으로는 그 누구도 구매할 수 없도록 독점계약을 맺었죠. 이에 대해 반타블랙 제작사 Surrey Nano Systems에서는 카푸어의 편을 들어줍니다. "반타블랙은 전통적인 페인트나 안료와는 다른 방식으로 제작되기에, 예술작품에 사용하기 부적절하다. 또 전문적인 사용 방식이 필요하다. 가격 또한 매우 비싸다. 이런 이유로 카푸어에게만 독점적으로 예술에서 사용할 권리를 부여했다."


  

가장 핑크스러운 핑크의 등장

스튜어트 셈플과 그의 핑크 안료 © Stuart Semple Youtube

사건이 본격적으로 커지게 된 건, 현대미술가 스튜어트 셈플 Stuart Semple 때문이었습니다. 셈플은 카푸어의 독점 사용 소식을 듣고, 가장 핑크스러운 핑크 Pinkest Pink를 제작합니다. 반타블랙을 독점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죠. 이 핑크색은 누구나 구매할 수 있었지만, 구매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아니쉬 카푸어가 아니며, 그의 대리인도 아님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셈플은 이 움직임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단 한 사람만 반타블랙을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가 가질 수 있는 분홍색이 생긴다면 어떨까요?""이 핑크는 소유권과 엘리트주의, 특권과 접근성에 대한 것입니다."

아니쉬 카푸어가 직접 올린 인스타그램 포스팅 @ Dirty_cornor

여기까지는 예술적입니다. 기술 차원에서 만들어진 색깔을 독점한 예술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제외한 모두가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핑크. 하지만 카푸어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셈플이 제작한 핑크를 구매해, 인스타그램에 인증샷을 올린 것이죠. 가운뎃손가락에 안료를 찍어 바른 채 "Up Yours #Pink"



사람들은 비난했습니다. 반타블랙을 본인만 사용할 수 있게 독점해놓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핑크 안료를 가운뎃손가락으로 찍어 올린 사진을 업로드하다니! '예술적 움직임에 유치한 감정이 개입되었다'거나, '추하다'거나, 'Ok Bean Boy(카푸어의 구름문 별명을 사용한 조롱)'라는 등의 반응이 뒤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푸어는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죠.


사건 이후 아니쉬 카푸어의 또 다른 포스팅 @ Dirty_cornor

카푸어는 이처럼 미술씬에서 거침없는 발언과 행보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전에 아이 웨이웨이 Ai Weiwei가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작업을 선보였다는 이유로 수감되었을 때, 카푸어는 소셜미디어에 이를 비난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죠. 사회 이슈에 목소리를 내고, 때로는 이슈의 당사자가 되고, 때로는 이슈를 부풀리는 주동자이기도 한 아니쉬 카푸어.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으로 볼 수 있는 그의 전략은 오히려 카푸어의 작품 브랜딩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거대한 규모로 관객에게 압도감과 불안감을 주고, 때로는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기 센 작품들을 선보이기 때문이죠. 국제 미술계에서 그의 작품은 반타블랙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인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출처: Artsy, 최근 36개월 기준 (2022)


MIT 연구진의 '리뎀션 오브 베니티' © MIT
스튜어트 셈플의 Black 3.0 © Deezen

여전히 반타블랙은 예술가 중에서 카푸어만 사용 가능한 컬러입니다. 하지만 2019년, MIT 연구진이 반타블랙보다 7배 흡수율이 높은 검은색 (리뎀션 오브 베니티 Redemption of Vanity)를 개발하며 가장 블랙스러운 블랙 별명은 넘겨주게 되었죠. 또 Pinkest Pink를 개발했던 셈플이 반타블랙과 맞먹는 흡수율의 블랙 물감을 내놓으며 대중이 사용할 수 있게 만들기도 했고요.


'가장 어두운 블랙'이라는 상징성은 모두의 것이 된 현재, 카푸어의 독점은 한낱 객기로 보였을 수 있지만, 현대미술씬에서 예술가들이 독점적인 지위를 갖기 위해 고군분투한 대표적인 사례로 남게 되었습니다. 현대미술 작가들의 치열한 브랜딩 전쟁,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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