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장국영...
백발마녀전. 중국 무협작가 양우생 원작으로 원제는 '여도 옥나찰'이다.
80년대 홍콩영화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 빠지지 않는 것이 더 힘들었던 세대들에겐 장국영과 임청하의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그야말로 노스탤지아를 자아내는 이름들이다.
2014년엔 지금 중국을 들었다 놨다 하는 판빙빙 주연으로 '백발마녀전-명월천국' 이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장국영이나 임청하, 판빙빙을 얘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름' 얘기를 하기 위함이다.
위애인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마녀가 되다.
백발마녀전 명월천국의 포스터 카피다.
줄거리는 간략하게 이렇다. 무당파(武當派) 제자로 협(俠)의 길을 가는 남자 주인공이 어느 동굴에서 복수를 위해 무공 수련 중인 여자 주인공을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런저런 사연 끝에 함께 죽는다.
여자는 이름이 없다. 없었다. 이름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를 불러주는 누군가를 위한 것이다. 관계 속에서만 이름은 의미를 갖고 존재할 수 있다.
극중 탁일항이라는 이름의 남자 주인공은 복수를 위해 이름을 버린, 이름이 없는 여자 주인공에게 '예상(霓裳)'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예'는 무지개를 '상'은 치마를 뜻하는 한자다. '무지갯빛 치마'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예상, 무지갯빛 치마. 그냥 '예쁜' 이름이 아니다.
현세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암시한다.
저 유명한 당(唐) 현종과 양귀비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현종이 꿈속에서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옷을 입은 선녀가 춤을 추는 것을 본 뒤 꿈속의 광경에 곡(曲)을 붙여 음악을 만들게 한다.
이 곡이 바로 '무지개처럼 아름답고 깃털처럼 하늘하늘한 노래'라는 뜻의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다.
예상우의무, 곡에 맞춘 춤의 주인공은 물론 양귀비였다. 예상우의곡은 현종과 양귀비의 달콤한 사랑의 은유인 것이다.
영원할 것 같은 '달콤함'은 그러나 영원하지 못했다. 한때 현군이었던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 정사가 어지러워지며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다.
난을 피해 도망가는 현종에게 성난 민초들이 양귀비를 내놓으라고 으르렁댄다. 현종은 분노한 군중에 차마 사랑하는 이를 내놓지는 못하고 양귀비는 스스로 목을 맨다.
고금과 동서를 통틀어 사랑 노래 중에 가장 절창 가운데 하나인 당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는 이를 소재로 탄생한다.
장한가 中
緩歌慢舞凝絲竹 천천한 노래 천천한 춤 비단과 피리에 어우러지니
盡日君王看不足 하루종일 보아도 임금에겐 부족하더라
漁陽瞽鼓動地來 어양 땅 북소리 땅을 흔들며 다가오니
驚破霓裳羽衣曲 놀라 깨어졌구나, 무지갯빛 치마와 깃털옷의 노래여
깨어진 예상우의곡. '어양'은 안록산이 난을 일으킨 본거지로 현종이 양귀비의 춤과 노래를 더이상 볼 수 없게 됐음을 뜻한다.
황제와 귀비,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었던, 영원할 것만 같았던 달콤한 사랑이 끝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여주인공 예상이 '기억을 잃어야 하는' 무공을 연성하기로 결심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예상은 내가 당신을 못 알아봐도, 당신에게 냉정하고 차갑게 굴어도 그건 나의 의지가 아니라는 말을 남기고 기억을 잃는 대신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낸다.
남자 주인공 탁일항은 '예상, 예상이라는 이름을 준 사람이 나다. 나를 기억 못하느냐"며 절규하고 예상은 자신이 예상임을 기억해내고 '사랑하는 사이'로 함께 죽는 것으로 끝난다.
'이름'과 관련해서 우리나라에도 어떤 사연 못지 않은 '스토리'를 가진 이들이 있다.
일제 때 일이다.
눈 펄펄 내리는 함흥에서 처음 만나 서로를 사랑하게 된 권번 기생과 당대의 엘리트 시인의 얘기다.
기생에게 이백의 시를 따 '자야'란 이름을 지어 주고 "같이 만주로 가자'는 시인.
그의 마음만 받고 끝내 몰래 떠나버린 기생.
그 기생에게,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
로 시작하는 시('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하나 불쑥 내밀고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며 떠난 시인.
기생은 훗날 물경 천억 원이 넘는 요정 대원각의 주인이 된 길상화 김영한.
시인의 이름은 백석이다.
훗날 북에 남게 된 백석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에 복무'하는 시를 쓰지 못해 집단 농장으로 '하방'돼 북에서 쓸쓸히 죽고 길상화는 지금은 '길상사'라는 절이 된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고 다 놓고 떠난다.
"내 재산이 백석의 시 한줄만 못하다"는 말을 남기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 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시처럼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장국영은 왜 그리 스스로 서둘러 갔을까. 를 안주 삼아서.
"너와나는 1분을 같이했어. 난 이 소중한 일분을 잊지 않을거야. 되돌릴 수도 없어. 이미 과거가 되버렸으니까."
아비정전 中.
그리운 것들이, 다시 오지 못할 날들이,
다시 잡아보지 못할 것들이 너무 슬픈 하루다.
아, 장국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