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어렸고 지금은..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이 일본에서 출판된 것은 1980년대 중후반 어디쯤이다. 그즈음 일본의 기세는, 특히 경제적으로, 말그대로 '욱일승천'이었다.
록펠러 센터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콜롬비아 픽쳐스..미국의 상징이랄 수 있는 것들이 일본 회사들에 줄줄이 넘어갔다. 줄줄이 먹어치웠다.
그렇게, 영화 시작할 때 스크린을 가득 채웠던
그리스 여신 의상에 횃불을 들고 있는 금빛 블론디의 콜롬비아 영화사,
미국 영화 여신의 머리 색깔은 금발에서 '흑발'로 바뀌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은 삼성에 밀려 한물간 소니가
지금의 애플, 아니 그 이상,
전세계 모든 기업을 대표하는 혁신의 상징이었고,
온갖 '첨단 장비'들이 나오는 영화, 빽투더퓨처 에서
신기한 것, 잘만든 것을 두고 '모든 좋은 것들은 다 메이드인저팬' 이라는 대사가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였다.
상실의 시대'...한국어 번역 제목은 그래서 그 함의에도 불구하고 내겐 역설적이었고, 거부감마저 들었다.
그 거부감과 반감의 원천은 대충 이랬다.
부동산 버블이 꺼지면서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되기 전까진
일본은 모든게 넘쳐나고 풍족한 시절이었을 거다.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은, 일상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사랑' '상실' '노르웨이'...이런 추상적인 거에 매달리지 못한다. 언뜻 생각이 날 수는 있겠지만. 대개는.
발에 흙 안묻히고 손에 물 안묻히고 사는 사람들에게 생존이나 생활에 대한 얘기는 구질할 거고,
상실이나 잃어버린 것, 다시 가지 못할 것 따위 추상적인 것들은 도드라지게 보였을 거다
노예들의 노동력으로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 없던, 정확하게는 더 잘먹고 살았던 그리스 '시민'들이 '철학'을 한거나 로마인들이 '유희'를 한거나.
'노르웨이의 숲'이든 '상실의 시대'든 제목이 뭐든
다를 바 없다 생각했다.
연예쟁이 싸가지 없는 한 인간의 개인적인 상실감을,
상당 부분은 지가 자초하기까지 한 걸, 시대의 상실감처럼 치환하는 게 싫었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젊은 시절, 슬렁슬렁 넘겨보긴 했어도 상실의 시대를 '읽진' 않았다.
첫사랑 읽고 술에 떡이 돼 꺼이꺼이 공중 전화통 붙잡고 울며 불며 하던 시절에도. '상실의 시대'에서 위로와 위안 따위를 찾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때는 어렸고 유치했고, 무엇보다 그래도 됐다.
근데 얼마전 저 책을 우연히 일게 됐다.
한글자 한글자가, 한 장 한 장이. 한 사연 한 사연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엄청나게 술을 불렀다.
사랑하는 이를 읺은 슬픔은 치유할 수 없다. 라...
많은 위로와 위안이 됐다.
치유할 수 없는 걸 치유할 수 없다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것도 있다고 말을 건네주는 것만으로,
아파해도 된다는 그 뜻이 고맙고 위로가 됐다
스물 하나. 그 시절 읽었다면 어땠을까...
이또한 지나갈 거를 믿을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