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달리는 지하철에서 언니가 연극을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했을때, 그때 참 잘 됐다 싶었어. 언니가 오랜시간 고민했던 일이기도하고, 언니가 하고 싶었던 일이기도 했으니까. 막연히 좋아하는 것을 선택한 언니가 부럽기도 했어. 늦은 밤 언니는 노량진역에서 내렸고 나는 1호선을 타고 쭉 집으로 왔어. 집에 오는길에 왜이렇게도 난 마음이 아팠을까. 언니의 새로운 길을 정말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버스 창문에 비친 내모습을 보자니 그냥 울음이 나버렸어.
오랜기간 똑같은 시험을 준비하면서 난 많은 걸 잃어버렸던 것 같아. 내 자신에 몰두하느라 옆에 있는 사람을 살피지 못했어. 그리고 세상이 너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일찍 깨달아버린 것 같아.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존재한다는걸, 쳇바퀴 같은 몇년동안 모든걸 수긍해버렸지. 그리고 말했어. 하고 싶은 일을 하는거. 그거 가진 사람들만 할 수 있는 배부른 소리라고.
그런데 언니를 보니까 아니더라. 언니가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는 과정이 마냥 쉽지 않아보였거든. 연극을 하기로 했다는 말을 입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건 진짜가 되어버리니까. 마음속으로 품었던 마음이 실제가 되고 진짜 그렇게 살아야 하니까. 오히려 즐겁게 내뱉어야 하는 말들에 떨림이 느껴졌어.
몇달이 지나 언니는 조심스럽게 카톡으로 공연 소식을 전했어. 포스터 끝에 출력된 언니 이름 세글자가 제일 눈에 띄었지. 연극을 보러 가기전에 무슨 선물을 사야할지 한참을 고민했어. 고민끝에 언니가 좋아할 초코케익을 사들고 극장에 들어갔지. 연극이 시작했는데 언니모습이 한참동안 보이지 않더라. 언니를 찾느라 극에 집중하지 못했어. 드디어 언니가 나왔는데 생각보다 너무 비중이 작은거야. 그냥 놀랐어. 실망따위가 아니라 그냥 문득 언니가 극중의 아주 작은 그 부분을 연기하기 위해 얼만큼 연습했을까. 수백번을 연습하면서 매번 어떤 감정으로 연기할지 얼마나 많이 고민했을까. 그런 생각들. 연극이 마치고 밖에서 언니를 기다렸어. 주연배우들이 다 나가고, 공연장을 정리하고, 분장을 지우고, 한참이 지나 언니가 나왔고 우리가 건넨 초코케익을 수줍히 받으며 언니가 뱉은 첫마디는 "배고프지, 떡볶이 먹으러 가자"
혜화역 2번 출구앞 포장마차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먹으며 오늘 공연에 대해 살짝 이야기 했던 것 같아.
그렇게 언니가 하는 두번째, 세번째 연극을 꾸준히 보게 되었어. 난 뭐든지 솔직히 이야기하는 버릇이 있잖아. 세번째 연극이 끝나고 언니에게 말했어.
"언니는 연기가 아니라 언니가 진짜 이야기하는 것 같아." 난 사실 칭찬으로 한 말인데 갑자기 언니 표정이 너무 어두워지더라. "그게 내 한계야. 극 중의 모습이 내 모습과 너무 닮아있거든. 극 중의 나는 내가 되면 안되는데." 괜히 언니한테 고민거리를 던져준 건 아닌지 집에 가는 길에 내 입을 몇번 때렸어.
항상 언니 연극을 보고 돌아가는길에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언니는 행복할까, 궁금해지더라. 누가 나한테 이런 질문하는거 정말 질색하면서 괜히 언니한테는 물어보고 싶었어. 사실 어떤 대답을 해주길 원한건 아니야. 그냥 언니가 대답할때 어떤 떨림을 가지고 말을 하는지, 언니의 말이 지나간 자리는 어떤 공기로 가득한지, 그게 느끼고 싶었나봐. 언니가 그 시절 내게 보여준 본질적인 고민들의 흔적도.
안희정 무죄판결이 나던 날, 갑자기 뒤집어진 여론을 보고 너무 화가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광화문 집회에 다녀온 이야기를 언니한테 했었지. 언니도 가고 싶었는데 공연연습으로 오지 못했다고, 자유로운 내가 부럽다고 했어. "우리는 아직 젊어서 객기 같은게 있는데 끊임없이 공부해야해. 감정적으로만 부딪히지 말고 본질적인 고민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어야해."
그날의 일들을 떠올리며 열을 올리며 분노하는 날 보고 언니가 해줬던 말이야. 나보다 고작 두살많은 언니인데 말하는 건 완전 어른 같더라. 내 감정을 조금이나 공감해주길 원했는데 언니의 잔소리가 약간 듣기 싫었나봐.
"나도 충분히 생각한거야. 내 생각이 다 옳지는 않지만 그래도 난 아직 약자의 편에 서고 싶어" 그냥 자존심이 상해서 나도 모르게 무슨 말이든 내뱉었어.
"늘 그래야지, 지금은 여성이지만 또 언젠가 다른 존재가 그리 되었을때 그 편에 서야지."
언니가 해준 이 말이 잠에 들기 전 문득문득 생각나.
언니는 지금도 같은 편에 설 다른 존재를 그리고, 그 존재가 되는 연습을 하겠지. 어떤 대사로 어떤 몸짓으로 그 존재가 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할거야. 처음 연기를 하겠다 했던 언니의 떨렸던 목소리가 자꾸 생각나. 그 떨리는 목소리로 다른 존재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을 언니가 너무 멋있는 거 있지. 인생의 무슨일이 생겨 언니가 연기를 때려치겠다고 해도 난 언제나 언니편이야. 어쩌면 언니에게 쓰는 이 편지는 나에게 쓰고 싶은 편지일지도 몰라. 난 언니처럼 연기는 못하지만 언니가 하는 그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언제나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