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일터에서
생각보다 약사는 다양한 일을 한다. 선택지가 많다는 건 고민할 일도 많다는 거다. 약사가 되고 2년동안 세번째 직장으로 이직하면서 난 생각하고 생각했다. 무엇을 할때 가장 행복할까. 뒤늦은 사춘기를 겪으며 전문직의 유일한 장점인 이직의 유연함을 열심히 실천했다.
세번의 이직을 하면서 주변에서 그랬다. 이직 참 쉽게 잘한다고 대단하다고. 물론 큰 공백없이 기막힌 타이밍으로 노동을 이어갔지만 때려치기를 결단하는 순간은 늘 괴로웠다. 이미 이곳에 익숙해졌는데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이 있을까? 내 선택에 후회는 없을까? 다른 선택지가 없다면 그냥 이곳에 뿌리박고 안주할텐데 다른 세계가 너무나 궁금했다. 안해보고 후회하느니 똥이는 뭐든 밟아보자고 했다. 그렇게 두번째 퇴사를 했다.
세번째 직장. 나는 회사를 다닌다. 공공기관에서 근무한다. 대부분의 약사들은 병원과 약국에 포진되어 있기에 이곳에서 내 라이센스는 희소하다. 나 또한 주변에 약사가 아닌 다양한 동료들을 볼 수 있어 좋다. 주로 대상자 집에 직접 방문해서 약물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한다. 상담은 1시간 가량 진행한다. 만성질환 1개 이상, 약물을 60일 이상 연속으로 10개 이상 복용하는 환자들을 주로 방문하고, 또 우선순위가 있다면 60세 이상 독거노인이다. 약국이나 병원에 있을 때 환자를 대상으로 한시간 상담을 진행하는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데 긴 시간을 나와 대상자로 채워진다는게 처음에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그런데 부족하면 부족했지 결코 긴시간이 아니였다.
환자의 집에 가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일단 한시간 가량 집을 내어준다는 건 자신의 사소하고 사적인 모습까지 보여주겠다는 의미다. 어떤 약을 먹고 있는지, 안먹고 보관하는 약은 무엇인지, 너무 오래 보관해서 유효기간이 지난 약은 무엇인지, 주변에서 좋다고 사먹은 건강기능식품은 무엇이 있는지. 대상자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맘껏한다. 어떤 분은 약사가 자신의 병을 치료해줄 엄청난 약을 알려줄거라 기대하기도 하고, 약사 니들이 뭔데 처방 변경도 못해주면서 여기 왜 왔냐는 냉대를 하기도 한다.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있는 만큼 나를 보고 반응하는 것도 가지각색이다. 무튼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여지든지 상관없이 나는 대상자들이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약을 먹도록 돕는다.
한 사람의 약력은 하나의 이야기다. 언제부터 왜 아프게 되었는지, 무엇이 아파서 어떻게 약을 먹게 되었는지.
아프게 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한 사람의 역사를 본다. 질병에는 원인이 있고 나는 그 이야기에서 원인을 찾기도 한다. 한 시간안에 찾는데는 한계가 있지만 어느정도 가늠을 한 뿐이다.
사람을 마주하는 일은 지치고 힘든 일이다. 두 명정도 이어서 상담하고 나면 혼이 잠시 나간 것처럼 정신이 멍하고 몸도 지친다. 하지만 나는 약사니까, 약사가 된 순간부터는 사람을 마주하는, 특히 아픈 사람을 만나게 될 운명을 내 숙명이라 생각하고. 살아가기로 한다. 이 일들이 내 성향과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마주한 이야기들을 글로 남기고 싶은 욕구는 항상 있고 다만 그 욕구를 실현하기에는 내가 게으르다는게 문제지만. 차곡차곡 이야기로 남겨둬야지. 오랜만에 글을 쓰다니. 타자 위에 손가락이 어색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