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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이 Aug 23. 2021

미안함을 고마움을 바꿀 수 있는 능력

아빠의 환갑잔치가 내게 준 것


아빠의 나이가 육십줄에 들어섰다. 일년 전 부터 형제와 차곡차곡 돈을 모았고 우리가 목표한 금액을 아빠 환갑잔치에 거하게 쓸 생각이었다. 그 금액은 오백정도였고, 월 이십만원씩 일년정도 모았다. 코로나가 사라질 줄 알았다. 오백으로 부모님 여행을 시켜드릴 생각이었다. 평생 일만 하고 살아온 아부지에게 추억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런데 세상 일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여행은 무슨 코로나가 더 심해져 가족끼리 외식 조차 할 수 없었다.


서울의 비싼 호텔 저녁을 예약했는데 취소 당했다. 한달 전에 예약한 식사였는데. 평소에도 비싼 호텔음식을 손쉽게 먹는 타입도 아니고 이때 아니면 인당 십오만원 훌쩍 넘는 식사는 언제 해보겠어. 사실 내 사심이 크게 들어간 잔치였지만 사심이 들어간들 뭔들. 모두에게 행복하면 되는 것을. 좋은 호텔 식사와 멋들어진 사진으로 환갑잔치를 보냈다 라고 남기고 싶었는데 실상은 집에 모여 아침에 엄마가 만든 잡채 요리와 갈비찜, 그리고 밀키트로 준비한 밀푀유나베 까지 식사를 하고 거실에 있는 조그만 탁자위 꽃바구니와 케익을 올려두고 소소하게 진행했다.


아빠와 엄마를 내가 예상한 포토라인에 앉게 하고 둘 사이에 태어난지 세달된 조카를 보내니 사진이 더욱 완벽해졌다. 조카가 생기고 나서 정말 신비한 광경을 목격하는데, 그저 먹고 자고 싸기만 하는 우리 귀염둥이 조카가 갑자기 빵끗 웃기만 해도 우리를 무장해제 시켜버린다. 사실 웃지 않아도 퉁명스럽게 뚱하게 쳐다봐도 자지러지듯 웃는다. 어느새 우리 모두 혀가 짧아진다. “울애귀 밥다무거쪄요?” 문득 서로에게 놀란다. 내게 이런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런데 그렇게 되더라. 생명의 신비이다.


세상에 태어난지 석달된 생명이 육십줄 인생을 살아온 삶에 안겨있다. 삼십년 전 내가 안겨있을때와 조금 다른 느낌이겠지. 피부의 탄력, 근육의 탄탄함,세월의 체취. 그의 품에 안겨 아둥바둥하는 조카를 보며 삼십년 전 그의 품에 안겨있는 내 모습을 그린다. 요즘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본다. 언제 이렇게 아빠에게 흰머리가 많아졌는지. 얼굴에 주름은 왜이렇게 선명해졌는지. 웃으며 얘기할때 아빠는 항상 그랬다. 너희가 다 빼먹은거라고. 그렇다. 내가 아빠의 세월을 많이 먹고 자랐다.


부모…가족을 위한 희생…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런 삶을 살지 못할 것 같았다. 희생, 포기라는 단어가 싫었다. 할 수 있는데 못하는 듯한 무력감을 느끼게 해주는 단어라서. 타인에게 미안함을 자아내면서 그걸 합리화 시켜주는 단어 같아서. 희생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싫었고 부담스러웠고 무서웠다. 세상에는 어떤 당연한 희생이나 포기는 없다. 그게 설령 부모이고 가족이라 해도 당연한 건 없다. 희생하기로 선택한 거다. 희생이나 포기가 상실만 주는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자꾸 희생안에 사랑을 보게 되는데, 사랑을 말하면서 희생을 거부하는 태도에 모순이란 감정을 느끼면서다. 부모의 희생이 내안에 미안함을 남겼지만 그들은 미안함을 고마움으로 바꿀   있는 능력을 가르쳐 주었다.  능력을 열심히 사용하며 나는 고마움을 가진채로 그들과 남은 삶을 더욱 멋지게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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