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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 Oct 20. 2022

어떤 고상한 설거지

밧드야 설거지통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의 한 명인 어떤 인사는 하루 일과를 끝낸 저녁 직접 설거지를 하며 생각을 가다듬는 시간으로 삼는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아내였다. 굳이 이 말을 나에게 해 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무언가를 교훈으로 삼으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저택의 거실 중 하나와 맞붙은 주방, 아일랜드에 설치된 개수대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벽과 천장과 가구 곳곳에 숨겨진 간접조명으로 주방은 부드러우면서도 적당한 조도를 유지하고 있다. 설거지는 많지 않다. 식구 수와 일치하는 지름 큰 접시, 그 수만큼의 포크와 나이프가 전부다. 세제를 풀어놓은 개수대에 접시를 넣어 부드러운 수세미로 문지른 남자는 흐르는 물에 헹군 접시를 리넨으로 닦아 물기를 제거한다. 접시와 커트러리는 서랍 안에 정리되고 싱크대 위의 남은 물기를 닦아내는 것으로 설거지는 끝이 난다.


현실로 돌아왔다. 하나뿐인 거실과 맞닿은 주방의 벽면을 따라 싱크대가 서 있다. 기역자로 꺾인 싱크대 한쪽 면의 중앙에 인덕션이 있고 다른 면의 중앙에 개수대가 있다. 인덕션과 개수대는 일자에 가까운 상판으로 연결되어 있다. 인덕션 위에는 조리를 끝낸 냄비와 프라이팬들이 올려져 있고 개수대도 식사를 끝낸 후의 설거지 거리들로 가득 차 있다. 개수대 안에 들어가지 못한 설거지 거리들은 인덕션과 개수대 사이 상판에 정신없이 올려져 있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시간 상으로는 이쪽이 월등하게 유리하다. 이렇게 좋은 조건임에도 그 시간을 유익하게 활용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겠으나 사색을 할 만큼 한가한 설거지가 아니라는 변명은 한 마디 덧붙여본다.


부유한 인사의 설거지 이야기가 무언가를 넌지시 이야기한 것이었다면 설거지통과 관련된 이야기는 보다 직접적이었다. 개수대에 설거지통을 하나 놓으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는데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음에도 결국 설거지통을 구입한 것을 보면 의사를 타진했다기보다는 결정을 통보한 것에 가깝다 할 수 있었다.


아내는 설거지통만 들여놓은 것이 아니라 설거지를 하는 방법도 전수해 주었다. 설거지에 있어서는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 여기고 있기에 거부부터 하고 보려는 본능이 발동했지만 반복해서 듣는 동안 내용을 숙지하게 되었다.


어떤 주방세제든 기본적으로 독한 성분을 가지고 있기에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식기에 직접적으로 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설거지를 해야 할 그릇 하나에 따뜻한 물과 세제를 타서 수세미에 묻혀 사용하는 것이 안전한 설거지 방법이라는 것이다. 아예 설거지통에 물을 받은 뒤 세제를 조금 풀어 거품을 내고 설거지통에 설거지 거리들을 몽땅 집어넣는 방법도 있다. 깨끗한 물로 식기들을 헹굴 때 헹굼 수세미를 사용하면 설거지를 하는 시간과 물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도 깨알 같은 팁 중의 하나였다.


이 설거지 솔루션과 설거지통의 조합은 나름 괜찮은 면이 있다. 둥근 양재기를 놓아둔 것보다 공간 활용 면에서 유리한 것은 물론이며 설거지에 붙은 음식물들을 불리고 세제를 빨리 헹궈내는 데 설거지통 만한 게 없기는 하다. 다만 설거지 거리가 넘쳐나는 날이면 솔루션과 설거지통 둘 다 의미 없어지긴 한다.


오늘도 설거지를 하면서 제대로 된 사색은 하지 못했다. 생각은 항상 제 멋대로 뻗어나가 결국은 공상으로 끝이 난다. 그냥 잡생각이다. 설거지를 한 삼십 년 더 하게 되면 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려나. 잡생각도 삼십 년 묵으면 사색이 되는 걸까. 리넨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그의 주방과 달리 나의 설거지들은 식기 건조대에서 물기를 말리고 있다. 물기가 사라진 자리에 서서히 물 얼룩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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