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플레인 그레이터
거대한 종이가 있다고 치자. 무한에 가까운 종이다.
이 종이 위에 한 사람의 인생을 정리한다면 어떤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까. 사진을 나열할 수도 있고 인생의 순간순간을 글로 남길 수도 있으며 그림을 그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 사람이 평생 주고받은 편지나 문자, 이메일을 나열하는 방법도 있다. 각각의 방법에 나름의 장점이 있겠지만 나라면 OX 문답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기록하겠다. 어떤 질문에 대한 답으로 예 혹은 아니요를 선택하면 화살표를 따라 각각의 다른 질문으로 이어지고 이 질문에 다시 예, 아니요로 대답하게 되어있는 OX 문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어떤 형태로든 결정을 내린다. 출근 시간을 예로 들자면 몇 시에 일어날 것인가 하는 사소한 일부터 선택이 시작된다. 샤워를 할지 세수만 할지 결정하는 것 역시 선택의 영역이며 아침밥을 먹을지 먹는다면 어떤 메뉴를 고를지 옷은 무엇을 입을 것이며 출근 교통수단으로는 무엇을 택할 것인지도 결정해야 한다. 혹은 어떤 선택도 하지 않고 아무런 움직임 없이 하루를 보내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DNA가 우리 몸의 유전 정보에 대한 기록이라면 거대한 종이에 정리된 선택의 순간들은 인생의 경로에 대한 기록이 되지 않을까.
우리의 인생은 자신의 선택뿐 아니라 타인의 선택에도 간섭을 받는다. 다른 누군가의 인생 경로와 수평을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교차하기도 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다가 결국에는 소멸한다. 결코 간단하지는 않다.
우리 집 둘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파스타다. 둘째는 이태리에서 태어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파스타를 좋아하고 파스타에 집착한다. 아이로서는 다행인 것이 언제든 기꺼이 파스타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는 엄마를 만났다는 것이다. 덕분에 집에 파스타면이 떨어질 날이 없고 올리브유는 덕용으로 사야 할 정도로 소비량이 많다. 시판 소스를 쓰는 일은 없다. 신선한 계란이 있는 날은 까르보나라를 만드는 식으로 그날그날의 재료에 따라 파스타의 종류가 결정된다. 하다못해 반죽기와 제면기까지 준비되어 있지만 그것까지는 무리인지 잘 사용하지 않고 있다.
파스타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치즈다. 한 그릇의 파스타는 치즈를 갈아 뿌리는 것으로 완성이 된다. 이른바 화룡점정이다. 파스타를 만들겠습니까 라는 항목에서 예를 선택했다면 그레이터를 구입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이 필연적으로 이어지게 되어있다. 그레이터는 주로 치즈를 가는 강판, 제스터는 시트러스를 가는 강판을 말하는데 같은 강판임에도 무엇을 가느냐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게 된다. 하여간 그레이터를 구입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우리의 첫 선택은 아니요였다. 강판 하나가 이미 집에 있었고 그것으로 한동안 치즈를 갈게 되었다.
공중에서 치즈를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레이터를 잡은 손은 고정시킨 채 치즈를 잡은 손은 그레이터 위를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데 이 그레이터는 너무 무거웠고 갈린 치즈 입자가 너무 컸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우리는 같은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그레이터를 구입하시겠습니까? 이번에는 예를 선택했고 신촌의 주방용품 매장에서 가벼운 그레이터를 구입했다.
그런데 기대와 다르게 치즈는 잘 갈리지 않았다. 그레이터와 치즈 사이에 힘의 균형이 적절히 유지되어야 하는데 새로운 그레이터는 치즈를 버텨낼 힘이 부족했다. 일반적으로 파스타에 사용하는 치즈는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다. 꽤 딱딱하다. 둘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치즈가 튕겨나갈 위험이 있다. 위험을 느끼고 행동을 조심하다 보면 치즈를 가는 자세가 어설퍼진다. 그렇게 몇 개의 그레이터를 거치게 되었지만 만족스러운 물건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와 셋이 서교동의 파스타집에 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오픈된 주방 앞 카운터석에 앉았는데 그곳에서 목격한 것이 마이크로플레인의 그레이터였다. 치즈가 그레이터 위를 몇 번 오가는가 싶더니 눈꽃 빙수 같은 치즈가 파스타 위에 한가득 쌓였다. 너무나 쉽게 치즈를 가는 모습에 그동안의 힘들었던 일들이 눈앞을 스치며 눈물이 찔끔 났다, 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는 그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건가 라는 생각은 하게 되었다. 마이크로플레인의 그레이터를 구입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이 주어지기도 전에 결제가 완료되었고 그렇게 그레이터에 대한 걱정은 사라지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들을 비롯해 파스타를 본격적으로 만드는 업장의 대부분이 마이크로플레인의 그레이터를 사용한다고 하는데 써보면 그 이유를 바로 알게 된다. 치즈는 쉽고 곱게 그리고 안전하게 갈린다. 어떤 단점도 찾을 수 없는 데다 가격까지 합리적이다. 게다가 블레이드는 흔한 OEM 제품이 아니라 미국산이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다른 물건을 찾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경쟁 상대가 있다면 마이크로플레인 내의 상위 버전이다. 이 그레이터를 들이기 전까지는 치즈를 갈아달라는 말을 아내에게서 자주 들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얘기는 오가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할 시간에 치즈를 갈면 그만이다.
끝판왕이라는 단어가 있고 여기에는 한방에 가라는 말이 꼭 따라붙는다.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끝판왕을 구입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는 것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레이터 업계에서 마이크로플레인도 그런 존재다. 생각하지도 말고 망설이지도 말자. 결국은 마이크로플레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