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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 Oct 18. 2022

궁극의 밥맛을 찾아서

엔조 스텐 채반볼 세트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었다. 매해 봄이면 어김없이 가뭄 소식이 들려왔다. 논은 말 그대로 쩍쩍 갈라져 그 상태에서 모를 심는 것은 누가 봐도 가능하지 않을 일이었다. 기자는 농민들의 가슴이 타들어가고 있다는 멘트를 잊지 않았는데 어린 마음에는 마치 내 가슴도 타들어 가는 듯했다. 갈라진 논 앞에 넋을 놓고 앉아있는 농민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내년에는 쌀 한 톨 생산되지 않아 전 국민이 밥을 굶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여름에는 반대로 물난리 소식이 들려왔다. 물에 잠긴 논에서는 벼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운 좋게 홍수를 피한 지역도 폭우를 동반한 강풍을 맞아 벼가 모조리 넘어져 잡초밭처럼 변해 있었다. 수해를 입은 벼는 뿌리부터 썩어가고 있다고 했다. 농민들의 가슴도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는 멘트 역시 빠지지 않았다. 이것을 지켜보는 내 가슴 역시 썩어 날 지경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벼마저도 이 모양이 되었으니 다가올 재앙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 여겨졌다.

가을이 올 무렵이면 수확의 소식이 들려왔다. 엉뚱하게도 올해 농사가 유례없는 대풍년이라는 뉴스가 전해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내 눈으로 똑똑히 재난의 현장을 목격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텔레비전이라도 붙잡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화면 속 농민들은 밝게 웃는 모습으로 풍년가를 부르고 있었다. 다음 해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최악의 가뭄과 최악의 수해에 이은 유례없는 대풍년의 공식은 변하지 않았다. 내 가슴도 여전히 타들어갔다 썩어 문드려졌다. 그렇게 몇 해를 속고 나서야 더 이상 쌀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다.


쌀 걱정은 하지 않는 대신 이제는 밥에 대해 고민을 한다. 예전에는 그저 웬만한 반찬만 있으면 한 끼를 만족스럽게 해결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주 맛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없어지고 맛있는 밥에 대한 욕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미스터 초밥왕>의 주인공 쇼타였다면 맛있는 쌀을 찾기 위해 전국을 누비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쌀의 품종과 산지는 물론 물과 밥솥의 재질, 화력과 압력까지 밥을 짓는데 필요한 모든 요인들을 고려해 궁극의 밥맛을 찾았을 테지만 그의 열정을 따라갈 수 없는 나는 몇몇 도구를 바꾸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밥솥의 교체였다. 뚜껑이 무거운 주철 냄비를 구입해 밥을 지어보았다. 그런데 맛있는 밥을 짓기는커녕 밥 자체를 짓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불 조절을 한다고 하는데도 밥은 설익거나 탄내가 났다. 이 브랜드에서 주철 냄비의 화력 조절을 자동으로 해주는 밥솥을 출시했을 때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밥은 적당히 윤기가 있으면서도 찰진 맛을 냈지만 아쉽게도 내가 원하던 맛은 아니었다.


쌀을 씻는 도구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이런 과정들을 거치고 나서였다. 쌀을 씻는 전문 도구인 이 제품의 이름은 스텐 채반볼 세트다. 이 도구를 사용하면서 알게 된 쌀 씻기의 요령은 최대한 짧은 시간에 쌀알에 상처를 내지 않게 가볍게 쌀을 씻는 것이다. 쌀을 씻는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쌀이 물과 접촉하는 시간이다. 이 세트는 이러한 요령대로 쌀을 씻는 데 최적화된 도구인 듯 하지만 크기가 맞는 볼과 채반의 조합이라면 어떤 것을 사용하든 상관이 없을 것 같기는 하다.


제대로 쌀을 씻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 과연 어떤 맛의 밥이 나오게 될까 기대했으나 생각했던 것만큼의 드라마틱한 변화는 생기지 않았다.


밥의 맛에 가장 민감한 사람은 아마도 초밥 요리사들이 아닐까 싶다. 이들이 밥에 기울이는 노력은 만화의 주인공인 쇼타에 못지않을 것이다. 미슐랭 가이드 쓰리 스타 셰프인 오노 지로가 운영하는 스키야바시 지로에서는 양손으로 겨우 들 무거운 뚜껑으로도 모자라 커다란 들통에 물을 가득 받아 뚜껑 위에 올려놓고 밥을 짓는다. 그런데 이 업장에서는 쌀을 씻을 때 채반 같은 것은 사용하지 않는다. 채반을 이용한 쌀 씻기가 이론상으로는 정석인 듯한데 이를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는 뜻일까.


쌀 한 톨의 무게는 0.02그램 정도라고 한다. 이 작은 쌀알 하나에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가야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걸까.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해 지로가 들인 시간과 노력을 나는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그 끝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가는 수 밖에 없다. 어느 날 만날 지도 모를 한 그릇의 밥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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