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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 Oct 08. 2022

악기 아니에요 조리도구예요

트라이앵글 요리용 핀셋


어느 날 시계가 멈췄다. 앞서 언급되었던 어머니의 시계는 아니다. 아내가 와디즈 펀딩으로 느닷없이 구입한 비교적 저렴한 시계다. 본인의 것과 내 것을 함께 구입했는데 그나마 시계를 사용하는 것은 내 쪽이다. 정작 자신은 시계의 배터리가 다 닳을 동안 한 번도 팔목에 차지 않더니 어느 순간 애플 워치를 구입해 그것만 계속 차고 다니고 있다. 왜 시계를 차지 않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애가 크면 주려고 한다는 상식적이지 않은 답변이 돌아왔는데 당사자인 아이는 이 시계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시계가 멈추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해결을 할까. 동네 시계방을 찾아 배터리를 교환하는 경우가 일반적일 것이다. 배터리 교체 가격은 시계방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적게는 5천 원에서 많게는 2만 원까지 책정되어 있는 것 같다. 시계가 두 개니 배터리 교체 비용은 만 원에서 4만 원까지 발생 가능하다. 4만 원은 도를 넘은 경우라고 쳐도 만 원에서 2만 원은 생각을 해야 한다.


며칠을 뭉개고 있다가 시계방에는 가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고 시계의 뒤판을 열 수 있는 공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물건을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과 에너지가 엄청나게 소모되는 일이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분야라면 모를까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의 모든 제품을 파악하고 비교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럴 때는 기준점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는 그 기준점을 가성비 제품으로 잡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최저가를 기준으로 잡을 수도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가장 좋은 브랜드, 가장 비싼 제품을 알아보는 것으로 긴 여정을 시작한다.


시계의 뒤판, 전문 용어로 케이스 백을 여는 방식은 통일되어 있지 않고 브랜드와 모델에 따라 제각각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뒤판을 돌려 여는 스크루 백과 지렛대 원리로 뒤판을 들어 올리는 스냅온이 대표적인데 까르띠에의 경우는 나사로 케이스 백을 고정시켜 놓았고 롤렉스는 전용 공구가 필요한 독자적인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 중에서 내가 찾아야 할 방식은 스크루 백이었다.


시계 세상이 스위스의 세상이듯이 시계 공구 역시 그들의 그라운드였다. 스위스의 공구 브랜드도 여러 곳이 있으나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회사는 버젼 Bergeon이었다. 이곳의 케이스 백 오프너는 아마존 최저가가 40만 원에 육박했는데 관부가세까지 계산을 하면 오프너 하나의 가격이 50만 원에 가까웠다. 나의 직업이 워치 메이커 내지 테크니션이었던가 동네에서 시계방이라도 하고 있었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이 공구를 구입했겠지만 아무래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동네 시계방에서 배터리를 교체하는 비용을 만 원이라고 잡으면 두 개에 2만 원이 되는데 배터리의 교체 시기를 2년으로 가정하면 50만 원을 회수하는 데는 50년이 걸리게 된다. 배터리 교체 비용을 5천 원이라 치면 100년이 되니 살아서는 비용을 회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 공구와 시계를 대를 물려서 사용하고 그 다음의 다음대까지 가면 비용 회수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참에 물건 하나가 눈에 띄었다. 테니스공보다 조금 작은 고무공이었는데 검은색 바탕에 버젼 로고가 찍혀 있었다.


이 고무공을 케이스 백에 밀착시키고 힘을 줘 돌리면 뒤판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케이스 백을 열었다는 성공담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이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지만 비싸지 않은 가격이니 시도를 해보았다. 하지만 뒤판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고민의 시간이 다시 시작되었다. 버젼과 동급이거나 다음 급쯤 되는 호로텍  Horotec이란 브랜드가 있는데 이곳의 케이스 백 오프너는 가격이 보다 현실적이었다. 버젼의 공구가 세 곳을 잡고 돌리는 3점식인 반면 이 공구는 2점식이어서인지 가격이 비교적 저렴했다. 비용 회수도 최단 25년, 최장 50년이면 가능해 어쩌면 살아서 그 혜택을 누리게 될 수도 있었다.


이 물건은 국내에서 구입하는 게 가능해 그날로 물건을 구입했다. 그런데 무언가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을 감고 워치 메이커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앞치마를 두르고 작업대 앞에 앉은 워치 메이커는 루페를 눈에 끼고 있다. 한 손은 무브먼트가 고정된 홀더를 잡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핀셋이...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핀셋이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배터리 교체에는 금속 재질이 아닌 플라스틱 핀셋이 필요하다. 서둘러 버젼의 트위저를 주문했고 이 물건이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배터리를 교체할 수 있었다.



트위저 혹은 핀셋이라 불리는 이 물건은 그다지 대단한 도구는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전문적인 냄새를 풍긴다. 프라모델을 조립할 때도 이 핀셋의 유무에 따라 조립을 하는 사람의 내공을 짐작할 수 있고 알코올을 묻힌 탈지면을 그저 핀셋으로 집어 들었을 뿐인데도 의료인으로 신뢰를 하게 되는 효과를 발휘한다.


조리용 핀셋을 구입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멋있어 보여서다. 지금 생각하면 없어도 별로 불편하지 않을 물건을 굳이 구입을 해야 했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왠지 꼭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플레이팅 데코 용도로 쓰는 게 가장 좋겠으나 그게 아니어도 파스타를 돌돌 말아 접시에 담는 용도로도 사용되니 그것만으로도 사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고기를 굽거나 튀김을 할 때 집게 대용으로 사용한다는 후기도 꽤나 많아 적어도 물건을 놀릴 일은 없어 보였다. 핀셋은 두 개를 구입했는데 20센티미터의 핀셋은 데코 용도에 더 적합해 보였고 30센티미터짜리는 파스타 플레이팅이나 집게 대용으로 쓰면 어떨까 싶었다.


그러나 예상한 것에서 모든 상황이 조금씩 엇나갔다. 일단 매일매일 숙제처럼 한 끼 한 끼를 해결해 나가는 형편에 플레이팅이니 데코니 하는 것이 가당치가 않았다. 파스타야 많이 만들었지만 접시에 적은 양을 예쁘게 담아 먹는 것이 아니라 수북이 쌓아놓고 먹다 보니 핀셋을 사용하는 것이 애매했다. 집게 대용으로 핀셋을 사용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었다. 남들은 어떻게 사용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핀셋의 양쪽 다리가 충분히 벌어지지 않아 작은 조각이 아니면 재료를 집는 게 쉽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그냥 집게를 쓰는 경우가 잦았다.


한번은 은행을 볶아 식구들과 먹는데 젓가락으로는 은행을 잘 집지 못하는 아이에게 이 핀셋을 쥐어주었더니 은행을 전혀 흘리지 않고 빠르게 해치워 나갔다. 이거다 싶었다. 한 마디로 이 도구는 멋 내기 용이 아니라 사용 범위가 명확한 전문 도구였다. 플라스틱 트위저가 전류의 손실 없이 배터리를 교체하는 데 특화된 도구이듯이 트라이앵글의 핀셋 역시 정교한 플레이팅을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이 도구를 집게 대용으로 쓰려는 어설픈 시도는 이제 하지 않는다. 대신 이 핀셋을 쓰기 위해서라도 정교한 요리를 한번 해보겠노라 가끔 생각하지만 생각만으로 그치고 만다. 미식의 길은 멀고 늘 그렇듯 하루는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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