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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 Oct 12. 2022

쉐킷 쉐킷 신나게 볶아보자

휘슬러 웍


어머니는 유난스럽게 돈을 아끼던 사람이었다. 남편의 공무원 월급으로 육 남매를 키워야 했으니 이해가 가는 면도 있지만 절약하는 엄마를 둔 덕에 곤란한 경우도 많이 겪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모유 수유가 힘들어 분유를 먹였는데 분유가 맛있었는지 위의 형제들이 분유를 계속 퍼먹었다고 한다. 이럴 때 보통 사람들의 해결책은 분유를 충분히 사 두거나 아이들이 분유를 먹지 못하도록 단속을 하거나 둘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어머니는 분유를 사지 않는 것으로 이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오게 되면서 군대에 간 시절을 제외하고는 내내 서울살이를 했다. 집에는 부모님 생신이나 명절 때 가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때마다 집은 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머니의 사랑이라든가 고향의 푸근함 같은 감상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집의 형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간이 흘렀다고 어머니의 성향이 변할 리가 없었으므로 가구나 가전제품 따위를 바꾸는 일은 없었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 같은 물건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처음 보는 물건이 눈에 띄었다. 온풍기 비슷한 물건이었는데 그것보다는 목이 많이 길었다. 온풍기에서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 그 부위에 빨간 불이 켜졌는데 그곳에서 원적외선이라는 게 나온다고 했다. 원적외선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지만 어머니의 설명은 상식적인 선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기계는 근육통이나 피부 질환 같은 것은 물론이고 위장병이나 당뇨병 같은 내과 질환에도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나에게는 신경계통에 문제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런 것도 다 고칠 수 있다며 손사래를 치는 나를 답답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다음에 집에 갔을 때는 007 가방 안에 든 요상한 의료기기가 새로 등장했는데 이것도 온풍기와 마찬가지로 만병에 효과가 있는 기계였다. 만병에 효과가 있는 물건이 두 개씩이나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 물건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여기가 아프네 저기가 아프네 고통을 호소했으니 플라세보 효과마저도 없었음이 확실했다.



의료기기 쇼핑이 한바탕 몰아친 후에 새롭게 등장한 물건은 주방용품이었다. 일종의 웍이라고 할 수 있는 물건이었는데 스테인리스 몸통에 같은 재질의 뚜껑이 얹혀있었다. 옆으로 넓게 퍼져 있는 보통의 웍에 비해서는 훨씬 오목했다. 어머니는 여기에 국도 끓이고 불고기도 볶았고 나물도 데쳤다. 만병통치 의료기기처럼 쓰임새가 다양했다. 분명 물건의 적정가보다 비싼 가격에 구입을 했을 것이지만 음식 조리라는 원래의 용도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머니가 구입한 만능 조리기구는 많은 영역을 커버했지만 용도에 따라 다른 기구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냄비가 국이나 탕을 끓이는 용도라면 프라이팬은 굽거나 부치는 작업에 적당하고 여러 재료들을 빠르게 볶아내는 데는 웍이 제격이다. 휘슬러의 웍은 찜기의 기능도 있어 쓸모가 많겠다 싶어 구입한 것이다. 중국집 주방의 화덕처럼 강력한 화력은 아니지만 가스레인지에서도 웍은 적당히 쓸만했다. 손잡이가 하나인 편수 웍을 리드미컬하게 움직여 가며 음식을 조리하는 것이 정석일 테지만 가정용 화구에서 그것까지는 무리지 싶다.


그런데 몇 년 전 가스레인지를 인덕션으로 바꾸고 나서 웍을 사용하는 것이 조금 애매해졌다. 측면에 화력이 전달되지 않고 좁은 바닥 부분만 뜨거워지다 보니 웍 안의 재료에 열기가 골고루 닿지 않았다. 음식을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내용물을 위아래로 계속 섞어주는 작업이 번거로웠다. 이건 휘슬러 웍의 문제는 아니고 인덕션에서 웍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대안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어서 계속 웍을 사용하게 된다.


웍을 만든 사람들이 의도했던 바는 아닐 테고 나 역시 예상하지 못한 문제였지만 이 웍의 진짜 단점은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웍의 지름이 크다 보니 개수대에 똑바로 들어가지 않고 약간 비스듬히 자리 잡게 되는데 이 상태에서 본체와 찜기, 뚜껑까지 설거지를 하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 집만의 문제일 수도 있다. 주방 수전과 세제통이 싱크대 상판이 아닌 싱크볼에 설치가 되는 구조라 개수대가 더 좁아진 것일 수 있는데 그렇더라도 불편하다는 사실이 달라지지 않는다.


다시 웍을 구입한다면 이것보다 지름이 십에서 십오 센티미터 정도 작은 웍이 적당하다 싶은데 쓰던 웍이 있으니 다시 물건을 살 엄두는 내지 못한다. 양은 냄비라면 구멍이 날 때까지 기다려 볼 수도 있겠지만 삼중 바닥의 스테인리스 웍에서는 바랄 수 없는 일이다.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스테인리스 제품 선택은 신중해야 한다. 나의 수명보다 스테인리스 제품의 수명이 길 것이니 물건을 버리지 않는 한 돌이킬 기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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