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양품 국자
파짜콤 혹은 파짜꼼. 한국어가 아니라 언뜻 동남아시아 어느 나라의 언어로 들리지만 대한민국 땅에서 통용되던 어엿한 우리말이다. 철석같이 파짜콤으로만 알고 있던 불량식품의 표준 명칭이 달고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살던 지방을 떠나고 나서였다. 다른 지방에 살던 사람들과 동일한 경험을 했고 같은 추억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부르는 이름은 서로 달랐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파짜콤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달고나였다.
지역을 불문하고 아이들이 달고나에 끌렸던 것은 그 씁쓸한 맛이 좋아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틀로 찍어낸 모양을 손상시키지 않고 뜯어내면 달고나를 하나 더 받게 되는 게임의 방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어린이판 사행산업이었던 셈인데 그 사행심의 정도가 뽑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뽑기 장수는 설탕으로 만든 거대한 잉어 과자를 경품으로 내걸고 어린이들을 유혹했는데 주머니 속에서 숫자를 뽑고 숫자판 위 일치하는 숫자에 해당하는 경품을 획득하는 것이 이 게임의 룰이었다. 어떤 숫자가 걸릴지 알 수 없으니 공정한 게임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내가 목격한 바로 거대 잉어를 받아간 아이는 없었고 대부분 꽝에 그쳤다. 애당초 주머니 안에 거대 잉어에 해당하는 숫자가 있었는 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달고나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국자인데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집에서 달고나를 만들었고 열이면 열 국자를 태워먹었다. 국자를 태워먹고 난 후 길거리 달고나 행상을 다시 찾는 패턴 역시 일치했다. 나 역시 국자를 태운 일이 있는데 그 뒤처리에 대해서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 일로 혼이 난 기억도 없다. 어머니는 비록 갓난아기에게 분유는 주지 않았지만 사람을 닦달하지 않고 웬만한 잘못은 그냥 넘어가는 쿨한 미덕을 가지고 있었다.
국자는 세계 어디에나 있겠지만 매 끼니 국과 찌개를 먹는 우리나라에서 특히 쓰임새가 많은 물건이다. 우리 집은 딱히 국을 많이 먹지는 않지만 어쩌다 보니 국자 역시 여러 개를 가지게 되었다. 와이프가 독일에서부터 끌고 온 WMF의 국자와 두 개의 휘슬러 국자, 자루가 사기로 된 국산 국자에 무인양품의 국자까지 더해져 모두 다섯 개의 국자를 보유하게 되었다.
국자가 다섯 개까지 필요한 이유가 뭘까 싶은데 자루가 가장 길고 오목한 부분이 큰 휘슬러 국자는 곰솥 같이 속이 깊은 냄비에서 사용하기에 적당하다. 그다음 크기인 WMF 국자와 사기 국자는 범용성이 높다고나 할까 어디에나 두루두루 쓰기에 무난한 편이다.
자루가 짧은 휘슬러 국자는 나머지 국자와 모양이 조금 다르다. 고리에 걸 수 있는 구멍이 없고 자루의 끝이 두껍고 무겁다. 무게중심이 아래쪽에 있지 않고 위쪽에 있다 보니 냄비에 국자를 걸쳐 놓으면 어김없이 국자가 쓰러져 국물 속으로 빠지게 된다. 그런가 하면 국자를 냄비의 바깥쪽으로 걸쳐 놓기에는 자루의 길이가 애매하다. 국자를 이렇게 디자인 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를 해보려고 노력해봤지만 나의 상식으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 국자와 반대의 위치에 있는 것이 무인양품의 국자다. 국자는 전반적으로 얇고 가볍다. 마찬가지로 고리에 매달 수 있는 구멍은 없는데 대신 자루의 끝이 바깥쪽으로 한번 꺾여있다. 별 것 아닌 듯 보이는 꺾임 하나가 이 국자를 가치 있게 만들어 준다. 곰솥 같이 큰 냄비가 아니라면 가볍고 작은 국자가 평소 사용하기에 편리한데 이런 국자가 냄비 속으로 쉽게 빠지는 데 비해 무인양품의 국자는 냄비 테두리에 가볍게 걸쳐진다. 또한 국자 안에는 15밀리리터와 30밀리리터를 표시해 놓은 눈금이 있어 계량스푼을 따로 찾을 필요도 없다.
무인양품은 싸고 좋은 품질로 상품을 개발한다는데 상품 가격이 저렴한 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생활의 기본이 되며, 고객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한다는 모토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관성적으로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한 것이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그렇기에 집에 있는 국자 중에서 가장 손이 많이 가는 것이 무인양품의 국자다. 좋은 디자인이란 이런 것일 테다. 노 브랜드라는 그들의 이념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된 것 역시 괜한 일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