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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 Oct 10. 2022

요리에도 연장이 필요하다

WMF 키친툴


해외 수입품이 곧 사치품으로 통하던 시절 수입품은 국내에서 무척 비싼 값에 팔렸다. 운송비용과 관세, AS비용 등이 포함된 것이라 쳐도 터무니없는 가격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래도 물건은 꽤 잘 팔렸던 모양이다. 가격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선호하는 소비자의 이상 심리를 이용해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물건을 팔아먹으며 배짱을 부리던 장사하기 참 편한 시절이었다. 요즘도 일부 품목은 현지 판매가와 수입 판매가가 크게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은데 현지에서 세일이라도 하면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브랜드는 소비자들이 알아서 해외직구를 하니 크게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사정이 달랐다.


해외에서 직접 물건을 들여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때라 어쩌다 해외여행이라도 가게 되면 보따리 가득 물건을 싸들고 오곤 했다. 여행자유화 이후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던 물건은 코끼리 전기밥솥이었고 독일의 경우는 쌍둥이 칼과 휘슬러 압력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일이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되자 세관에서는 밀수사범들을 색출한다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밥솥을 사들고 오다 적발된 여행객들은 얼굴을 숨기기 바빴고 기자들은 카메라를 들이대며 이들을 몰아붙였다. 전압도 맞지 않는 전기밥솥을 굳이 들고 오는 사람들도 유난스럽다 싶지만 이들을 대단한 사회악이라도 된다는 듯 바라보던 시선은 글쎄다.


이 시기에 해외여행을 갔다면 나라도 뭐든 사서 들어왔을 것이다. 다만 전기밥솥은 사양이고 헹켈과 휘슬러 대신 다른 브랜드를 선택했을 것 같긴 하다. 이 두 브랜드는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독일 주방용품 브랜드가 아닐까 싶은데 독일 현지에서는 넘버원 프리미엄 브랜드로 WMF를 꼽는다.


이사를 앞두고 있었던가 이사를 한 이후였던가 옹색한 살림살이들을 보충하거나 교체할 필요가 있었다. 앞서의 밥솥 사태로부터는 오랜 세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국내에 진출하지 않았던 WMF는 그새 백화점에 매장을 여럿 내고 있었는데 가격은 납득하기 쉽지 않은 수준이었다. 와이프의 프랑크푸르트 출장이 결정된 것은 공교롭게도 이 즈음이었다. 그런데 무겁고 부피가 큰 냄비를 사들고 오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무리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독일 출장이 끝나고 돌아온 와이프의 짐은 단출해 보였다. 원래 가져갔었던 트렁크에 흔한 면세점 쇼핑백 두어 개가 더해졌을 뿐이어서 주방용품은 결국 못 사 왔구나 생각했다. 집에 도착해 짐 정리를 하는데 높이가 낮고 지름이 꽤 큰 전골냄비가 보였다. 뚜껑이 달린 냄비 안에는 옷가지들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짐의 부피를 줄이는 좋은 방법이다 싶었다. 전골냄비를 시작으로 트렁크 안에서 가지각색의 주방도구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뒤집개가 나오는가 싶더니 커트러리 몇 세트가 나왔고 국자와 그레이터와 필러가 차례로 등장했다. 두 종류의 거품기와 구멍 뚫린 국자, 캔 따개와 샐러드 서빙 스푼까지 작은 트렁크 안에서 물건이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이때 가져온 키친툴은 우리 주방에 잘 매달려 있다. 이 중 가장 자주 쓰는 도구는 뒤집개와 필러고 매일 쓰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아이템들이 대부분이다. 이 키친툴을 구입한 지 십칠 년 정도가 되었는데 처음 구입했을 당시와 상태가 거의 차이 나지 않는다. 모양뿐 아니라 필러와 그레이터의 절삭력도 변하지 않았으며 제각각의 기능에 전혀 문제가 없다.


공사 현장을 잘 알지 못하지만 연장에 대해서는 조금 아는 편이다. 콘센트에 플러그를 끼워 유선으로 사용하던 수공구들이 무선으로 바뀐지는 꽤 되었다. 고출력 배터리가 속속 등장하며 무선 공구로 할 수 있는 작업의 범위도 대폭 늘어났다. 연장의 발달과 함께 현장의 작업 환경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이는 공사 현장뿐만 아니라 가사 노동에도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좋은 연장을 사용하면 작업 효율이 높아지고 작업 시간이 단축된다. 성능 좋은 필러를 사용해 일 분 남짓한 시간을 아꼈다 쳐도 그게 무슨 대수냐 할 수 있겠지만 그 시간들이 모여 의미 있는 시간이 된다. 가사 노동은 고단한 일이다. 결과가 바로 나타나며 출근과 퇴근 시간이 일정한 공사 현장과 달리 시작과 끝이 없고 노동의 가치를 존중받지 못하는 가사 노동은 고단하면서도 외로운 일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좋은 연장이 필요하다. 공사 현장처럼 연장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는 분야가 아니기에 한 번 좋은 도구를 들여놓으면 두고두고 쓸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굳이 WMF의 키친툴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이다. 자신의 손에 맞는 연장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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