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빵 Oct 03. 2022

뼈통이 쓰레기를 지배한다

에스틸로 조리기구 보관함


펜데믹을 겪은 이후인 요즘의 상황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오피스 빌딩이 몰려있는 도심 거리의 점심시간은 대혼돈 그 자체였다. 한 집 걸러 한 집이 식당이었음에도 점심식사를 앞둔 직장인들을 모두 소화하기에는 좌석 수가 부족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식당은 더욱 경쟁이 치열했다. 치열했다는 말을 그저 과장된 말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으나 슈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직장인들이 식당을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일종의 편법이라고 해야 할까. 공식적으로 점심시간은 열두 시에 시작되지만 열한 시 삼십 분이 되면 회사에서 나와 식당으로 향하는 이들이 있었다. 열두 시에 점심시간을 시작하는 사람들과 이들은 경쟁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 출발선에서 스타트 동작을 취한 채 자신의 심장박동을 느끼며 출발을 알리는 부저를 기다리는 동안 누군가는 이미 결승선의 테이프를 끊고 우승 세리머니를 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페어 하지 않은 플레이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음에도 레드카드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 이 게임의 룰이기도 했다.


페어 하지 않은 상대와 발 빠른 상대를 맞아 운 좋게 원하는 식당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마냥 기쁜 일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중충한 인테리어와 낡은 집기들까지는 참을 만한데 끈적이는 테이블과 짜증기 섞인 종업원의 말투는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이런 시장은 소비자보다 공급자 마인드가 우선한다. 달리 말하면 어느 정도 맛이 보장되는 한 손님들은 알아서 찾게 되므로 그 외에는 무엇도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테이블 간격은 또 얼마나 좁은지 식사가 끝나고 나면 앞 테이블 손님의 가정사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옆 테이블 손님의 상사가 회사에서 저지르는 만행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이 외에도 개인적으로 신경이 쓰이는 식당 테이블 위 물건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두루마리 휴지였는데 이건 굳이 이유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뼈통이었다. 이걸 왜 하며 의아해할 사람도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쓰레기통이나 다를 것 없는 뼈통이 테이블 위에 있다는 것이 왠지 찜찜했다. 우리나라 음식점들은 테이블 아래에도 쓰레기통을 두는 경우가 많다. 이것만 해도 질색을 할 일인데 쓰레기통이 테이블 위까지 올라가 있는 게 반가울 리 없었다.


뼈통의 궁극적 용도는 쓰레기통이지만 테이블로 서빙될 때는 조리기구 보관함으로 변신한다. 가위와 집게, 국자와 수저, 하다못해 물티슈까지 뼈통에 담겨 테이블로 나오게 된다. 그런데 과연 이 쓰레기통을 정성 들여 씻을 거라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 단순히 심리적인 면을 넘어 불결함의 온상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한 것이 이 뼈통이었다.


이런 내가 뼈통을 사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집에서 밥을 먹은 후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것은 언제나 나의 몫이다. 밥을 먹고 나면 밥상 위에 휴지가 수북이 쌓이는데 생선이나 감자탕, 족발 같은 것을 먹은 날이면 휴지와 가시, 뼈다귀가 그릇과 함께 식탁 위에 정신없이 널려 있게 된다. 혼돈의 카오스다. 족발 왕국과 생선 왕국이 식탁이라는 영토를 놓고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인 끝에 모두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라는 스토리에나 어울릴 풍경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뼈통 구입을 결심하게 되었다. 뼈통을 쓴다고 쓰레기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흩어져 있는 것보다는 모여 있는 게 나을 듯싶었다. 일단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중요했다.



단순한 디자인의 뼈통을 사고 싶었지만 국내 쇼핑몰에서는 원하는 제품을 찾을 수 없었다. 원통 모양 그대로 만들면 간단할 것을 어떤 규칙이라도 된다는 듯 뼈통에는 가로로 긴 홈이 파여 있었다. 대부분의 뼈통에는 홈이 윗부분에 있었고 간혹 아래쪽에 홈이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도를 넘어 두세 개의 홈을 파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아마존에서 주문한 이 뼈통의 브랜드는 에스틸로라고 하는데 스테인리스 제품이 몇 가지 검색이 되지만 큰 업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물론 뼈통이라는 이름으로 물건을 팔고 있지는 않고 조리기구 보관함으로 판매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의 브랜드인지 OEM으로 인도에서 생산만 하는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뼈통의 원산지는 인도다. 잘 알려져 있듯 인도는 도시락으로 유명한 나라다. 매일 점심 때면 집에서 사무실로 도시락을 배달하는 독특한 행렬이 생기는 곳이다. 인도의 도시락 시스템을 국내에 도입한다면 점심시간의 혼돈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지만 도시락을 얕잡아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쉽게 바뀔 것 같진 않다. 인도의 인구가 엄청나고 도시락을 먹는 인구 역시 엄청날 텐데 그 많은 도시락을 만든 인도의 스테인리스 가공 기술이라면 믿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 제품의 마감은 그 명성에 비해 아쉬운 점이 많다.


어쨌건 이제 우리 집에는 뼈통이 있다. 감자탕 삼사 인 분은 충분히 커버하는 큰 크기도 장점이다. 제대로 첫 세척을 했고 쓸 때마다 깨끗이 닦아 식기로 써도 상관이 없다. 여차하면 냄비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누군가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했던가. 뼈통이야말로 쓰레기를 지배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식탁 위의 쓰레기들은 뼈통으로 모여든다. 감자탕이든 족발이든 이제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이전 19화 요리에도 연장이 필요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