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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 Oct 17. 2022

시인의 양계장

타다후사 빵칼


시내의 한 빌딩으로 출퇴근을 하던 시절 직장 상사가 자신이 어릴 적 살았던 동네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한 문예지의 주간이었으니 시시껄렁한 잡담이 아니라 업무 연관성이 있다고 볼 여지도 있는 이야기였다. 아침이 되어도 출근을 하지 않던 옆집 아저씨가 있었다. 이 아저씨는 집에서도 별다른 일을 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하던 일이 닭을 치는 일이었다. 직장 상사에게 옆집 아저씨는 그저 닭 치는 아저씨였을 뿐인데 이 양반이 시인 김수영이었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는 뭐 그런 얘기였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1980년대 말은 시의 황금기였다. 창작과비평사는 참여문학의 정체성을 그대로 이어나가던 때였고 문학과지성사와 민음사의 시선집을 통해 재기 발랄한 젊은 시인들이 속속 등장했다. 그즈음 카프 즉,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소속의 작가들이 해금되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정지용과 백석, 임화 등의 시를 접하게 되었다. 이들의 시 전집이 발간되고 나서 김수영과 신동엽의 전집이 덩달아 소환되었다. 기형도가 요절하고 전설로 남은 것도 이 무렵이다. 지하철에서 시집을 읽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던 마지막 시절이었다.


김수영 전집의 2권, 산문 편에 상사가 이야기했던 그 시절의 일이 언급된다.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저 소일 삼아 닭을 쳤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규모가 상상했던 것과는 무척 달랐다. 산문 <양계 변명>과 <토끼>에 의하면 김수영은 양계를 자신의 생업이라 밝히고 있다. 닭 백 마리로 양계를 시작했고 어머니에게 병아리 천 마리를 길러줬다는 것을 보면 그저 닭을 몇 마리 기르는 수준은 분명 아니었다. 전적으로 본인이 양계를 전담했던 것 같지는 않다. ”여편네가 시작한”거라 발을 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양계 일을 위해 ”담양에서 올라온 머슴아이”를 두기도 했다. 산문을 쓸 당시 “근 10년 경영”을 해 왔는데 머슴아이는 김수영의 집에서 “야간중학교를 마치고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년에 야간대학에를 들어갔“으니 이 머슴아이의 손을 빌린 시간이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양계를 생업이라 말하고 있음에도 실제로 양계가 생활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병아리가 “심할 때는 하룻밤에 10마리도 더 넘게 죽어 나“가고 ”나날이 늘어가는 사료의 공급을 하는 일이 병보다도 더 무“서울 지경이다. 머슴아이의 ”인건비가 안 나“올 정도여서 ”새학기에 수업료를 또 내주어야“하는 일이 ”난감“하기만 하다. 결국 ”한국의 양계는 한국의 원고료벌이에 못지않게 비참“하다며 양계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한다. 사료값을 고민하는 김수영에게 아내는 “닭이 알만 낳게 되면 당신도 그 지긋지긋한 원고료벌이 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게”된다며 남편을 다독거린다.



이 글을 읽은 후로 달걀을 먹을 때면 김수영과 그의 양계장을 떠올릴 때가 많다.


예전에는 귀했을 달걀은 가격이 저렴해져 만만한 식재료가 된 지 오래다. 만만하니 라면에도 달걀을 풀고 이래저래 먹다 보면 달걀 한 판이 금방 사라진다. 정작 필요할 때는 달걀이 없을 때가 많아 눈에 보일 때마다 사게 되는데 어떤 때는 달걀이 몇 판씩 쌓이는 경우도 생긴다. 그런데 꼭 이럴 때면 공교롭게도 달걀 소비가 확 줄어들어 처치 곤란 상태가 되곤 한다.


달걀의 유통기한은 꽤 긴 편이지만 언젠가는 썩기 마련이라 어떤 식으로든 소비를 해야 한다. 이럴 때 아내가 하는 음식이 반숙 달걀장과 달걀 샌드위치다. 달걀을 삶아 채에 내려 마요네즈를 섞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다음 식빵 사이에 두껍게 넣어주면 달걀 샌드위치가 완성된다, 라고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게 끝이 아니다.


갈색으로 변한 식빵의 가장자리는 분명 샌드위치로 먹기에 거슬리는 면이 있다. 맛이 강하지 않은 달걀 샌드위치에서는 이런 점이 더욱 부각된다. 그럼에도 식빵의 가장자리를 잘라낼 것인가 그대로 둘 것인가는 선택의 영역으로 남게 되는데 며칠 전의 상황이 딱 그랬다.


음식을 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아내와 나에게는 뿌리 깊은 것이다. 우리에게 배고픔의 기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기억을 가진 누군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거나 학습효과로 인해 생겨난 것일 테다. 샌드위치를 앞에 두고 잠시 고민하던 아내는 아이 몫의 샌드위치만 가장자리를 잘라냈다.


모든 가정에 필요한 물건이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 집에는 없으면 아쉬운 것이 빵칼이다. 한국의 원고료 벌이에 대해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을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재료는 밀이다. 그 덕에 집에는 빵과 과자가 떨어질 날이 없다. 아이까지 아내의 식성을 그대로 닮아 빵과 과자가 넘쳐난다. 빵을 좋아하다 보니 제빵까지 하게 되었고 빵칼은 필수품이 되었다.


식칼로 빵을 썰어본 사람들은 빵이 눌리면서 뭉개지는 듯한 느낌을 이해할 것이다. 회를 썰 때 회칼이 필요하듯이 빵 꽤나 먹는 사람들에게 빵칼은 꼭 필요한 물건이다. 타다후사의 빵칼은 긴 칼날과 원목으로 만들어진 칼자루의 느낌이 좋지만 대장간에서 쓰는 집게를 모티브로 삼은 로고가 더욱 인상적인 칼이다. 이런 감성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칼을 상징하는 것으로 대장간 집게를 들고나오는 이런 방식은 다분히 시적이다. 사랑한다. 당신의 메타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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