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 런치박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6년. 오후 수업이 없던 토요일을 제외한 나머지 요일은 매일 도시락을 들고 등교를 했다. 야간자율학습이 있던 고등학교 3년간은 저녁 도시락까지 챙겨야 했는데 교실 안에 사물함이 없던 시절이다 보니 교과서와 참고서에 도시락까지 더해져 가방 무게가 어마어마했다. 하교 때는 도시락 두 개의 내용물만큼 가벼워졌지만 그래도 가방은 여전히 무거웠다. 무거운 가방을 추켜올릴 때마다 빈 도시락 속에 든 숟가락과 젓가락이 요란스럽게 달그락거렸다.
초등학교 때만은 도시락에서 자유로웠는데 당시로서는 보기 힘들었던 학교 급식이 제공되었기 때문이었다. 무상급식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기에 급식비는 물론 부모님께 꼬박꼬박 청구되었다. 어쨌거나 나의 경우는 상당히 이례적이라 할 수 있었다. 내 또래 중에서 학교 급식을 먹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가 하면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학교에서 급식을 먹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세대다.
도시락파 대 급식파. 이 둘이 도시락을 대하는 시각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시락은 음식을 휴대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야외로 나들이를 가거나 할 때 먹는 특별한 음식으로 생각되어야 하는데 나에게 도시락은 전혀 별날 것이 없었다. 아침을 먹지 않고 학교를 가는 날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도시락은 특별식이 아니라 주식에 가까웠다. 정작 소풍을 가는 날이면 아이들 모두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양은 도시락이 아니라 일회용 알루미늄 포일 도시락에 김밥을 싸왔다. 학부모들에게도 도시락의 용도가 나들이용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어느 날 올레길을 걷겠다며 아내가 4박 5일 일정으로 제주도로 떠났다. 아내가 집을 비운다는 것은 곧 식사를 준비하는 주체가 아내에서 나로 바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는 식단의 급격한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모든 메뉴는 고기로 일원화된다. 고기를 구워도 먹고 삶아도 먹고 끓여도 먹게 되는데 아무래도 연달아 고기를 먹다 보면 질리기 마련이다.
이럴 때 쉬어가는 메뉴로 적당한 것이 김치볶음밥이다. 아이도 나도 평소 김치를 잘 먹지 않지 않는데 김치볶음밥 속의 김치만은 예외다. 김치볶음밥에도 고기는 듬뿍 들어가지만 김치와 밥과 어울려 새로운 장르의 음식으로 다시 태어난다. 회는 물려도 초밥은 물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등교시간이 한 시간 넘게 당겨진 탓에 아침은 더 고단한 시간이 되었다. 엄마가 없는 아침이니만큼 더욱더 눈이 확 떠질 만큼 특별한 식사를 차려주고 싶지만 준비된 거라곤 전날 저녁에 먹다 남은 김치볶음밥뿐이다. 한 번도 써보지 못한 채 싱크대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도시락을 떠올린 것은 이런 연유다.
급식파 아이는 역시나 도시락에 반색을 했다. 아침의 작은 이벤트에 즐거워하는 아이를 보며 제대로 도시락을 싸 어딘가로 다녀오자고 생각했지만 아직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식당에서 음식을 포장하는 용도로 써 볼 생각도 했는데 도시락의 구조에 딱 들어맞는 메뉴 역시 아직 찾지 못했다. 미안하다. 게으른 아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