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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 Jul 19. 2023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ICO 페이퍼 나이프


대학 동창 둘과 한 친구 집에서 오랜만에 모임을 가졌다. 집주인, 정확히는 그의 부인이 홍어삼합과 병어회를 준비했고 내가 안동소주 한 박스를 택배로 미리 보냈으며 다른 친구는 검은 비닐봉지에 든 무언가를 들고 왔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술상에 무언가가 새롭게 올라오지 않은 것을 보면 안줏거리는 아니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학교에 다닐 때는 지독히도 술을 마셔댔다. 술을 마시면서 무슨 얘기인가를 하긴 했을 텐데 그 무슨 얘기는 다른 무슨 얘기가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시답잖은 얘기였다. 세월이 흘러도 대화의 패턴은 바뀌지 않아 술자리는 언제나 아무 말 대잔치가 되고 만다. 옛날 얘기만 죽어라 늘어놓는 처량한 술자리는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하다. 술자리가 길어지자 누군가 유튜브에서 음악을 검색하기 시작했는데 음악 취향만은 과거 회귀형이라 고릿적 노래만 리스트에 오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릿적 노래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김광석의 노래다. 어떤 주제에서도 셋이 의견 일치를 보는 일은 드물지만 김광석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BTS도 블랙핑크도 브루노 마스도 아닌 김광석이라니. 에이 하며 손사래 칠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세대가 그에게 갖는 감정은 남다른 면이 있다. 여느 대중가수처럼 화려하지 않았으나 그와의 정서적 유대감은 어떤 가수로도 대체되지 않는 것이었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는 그가 남긴 많은 노래 중 하나다. 동물원 멤버 시절 발표되었으나 우리는 그 노래를 동물원의 노래로 기억하지는 않는다. 이 노래가 발표될 당시는 카카오톡과 문자 메시지와 전자 메일이 없는 아날로그 세상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는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유선전화라는 또 다른 소통 수단이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편지는 불편하고 느린 구시대적 유물이었겠지만 우리는 굳이 흐린 가을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편지를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편지를 쓴다고 해서 갑자기 중요한 얘기가 오가거나 내밀한 마음속 얘기를 털어놓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꼭 하지 않아도 될 얘기를 편지로 적어 보내면 비슷하게 뻔한 얘기가 적힌 답장이 도착했다. 다만 같은 내용이어도 말과 글의 뉘앙스는 무척 달랐다.


인장을 찍어 편지를 봉인하고 페이퍼 나이프로 편지를 개봉하는 영화 속 장면들은 인상적이었다. 인장을 찍는 것은 가문의 문장이 없기에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고 페이퍼 나이프만은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 페이퍼 나이프를 가지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후의 일인데 그때쯤에는 이미 누구와도 편지라는 것을 주고받지 않은지 오래된 때였다. 가족들의 생일에는 여전히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봉해지지 않은 편지라 페이퍼 나이프가 필요하지는 않다.


우편물은 거의 매일 도착하지만 사적인 편지는 찾아볼 수 없고 고지서나 정기간행물, 홍보물 등이 우편물의 전부이니 굳이 페이퍼 나이프를 사용해 조심스레 개봉할 일도 없다. 페이퍼 나이프는 그렇게 연필꽂이에 꽂힌 채 본연의 역할에서 멀어져 있는데 그 존재감만은 절대 잃지 않고 있다. 여러 추리소설에서 페이퍼 나이프와 팔레트 나이프가 살인도구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뭘 저런 걸로 하고 생각했지만 페이퍼 나이프의 실물은 생각 외로 섬뜩하다.


각진 편지봉투의 빈틈에 칼날을 집어넣은 후 칼날을 세워 앞으로 밀면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종이가 잘리며 편지가 비로소 개봉된다. 그 속에서 펼쳐지던 글자들의 향연은 이제 추억으로만 남을 뿐이다. 무심한 말투 속에서도 간혹 발견되던 반짝이는 문장. 그것을 읽는 일은 꽤나 즐거웠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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