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빵 Jul 22. 2023

뭐? 야구 기록원?

1회 초


우울한 날이었다.


친구 한 명과 합정역 부근의 보쌈집에서 약속을 잡았다. 바깥에서 저녁을 먹는 경우가 많지 않다 보니 어디에서 만나야 할지 감이 전혀 오지 않았는데 포장을 해서 한번 먹어본 보쌈의 맛이 나쁘지 않아 일단은 그곳에서 보자고 하고 통화를 마쳤다. 지하철 6호선의 어느 한 곳과 다른 한 곳 부근에 위치한 각자의 집으로부터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평일 저녁이었음에도 보쌈집 앞에는 긴 줄이 생겨있었다. 가족 단위의 손님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비슷한 또래의 무리들이었다. 아마도 친구이거나 직장동료일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들뜬 표정이었다. 그릇과 수저가 부딪히는 소리가 식당 안에 낮게 깔렸다면 사람들이 떠들고 웃는 소리는 부유물처럼 식당 안을 떠돌아다니며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비교적 평온한 우리 테이블은 평온하지 않은 테이블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아 넓지 않은 사인용 테이블의 건너편에 앉은 친구의 말소리도 잘 들리지가 않았다. 친구가 야구 기록원 이야기를 꺼냈을 때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 것은 이렇게 어수선한 환경적 요인도 있겠지만 그것이 너무 뜬금없는 얘기인 탓도 있었을 것이다.


미얀마로 여행을 가고 싶다던가 조지아로 여행을 가고 싶다던가 하던 친구는 야구 기록원을 해 볼 생각이 없냐는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이 시간 이전 누군가 아는 직업 백 개를 떠올려보라고 했다 치면 그 속에 야구 기록원이라는 직업이 포함되었을 확률은 제로라고 할 수 있었다. 직업의 개수를 천 개로 늘린다고 쳐도 답은 마찬가지였다. 천 개의 직업을 다 채우지 못하겠지만 그 안에 야구 기록원이 포함되리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친구의 제안은 진지했다. 본인이 사회인 야구 심판으로 일한 지 오 년 정도가 되었는데 체력적으로 힘든 심판과 달리 앉아서 하는 기록원은 할만하다는 것이었다. 그라운드의 유일한 사무직인 셈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야구 마니아인가. 아니다. 야구 규칙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아니다. 야구 기록에 한 번이라도 관심을 둔 적이 있는가. 절대 아니다.


야구 기록원이 가져야 할 어떤 자질도 가지지 못한 나로서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지만 왜인지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 글 역시 그날 일어난 일에 대한 일종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기록은 편집에 가깝다. 긴 타임라인 중 일부를 취사선택한 후 시간을 재배열하고 각색한다. 이 과정 곳곳에 주관과 편견과 불확실한 기억이 개입한다. 이른바 왜곡된 기록이다. 이런 식의 글쓰기에 익숙해있다 보니 주관이 최대한 배제된 순수한 기록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고나 해야 할까. 돌이켜보면 너무나 상반된 두 세계의 단면을 경험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 번 결정을 하고 나자 거침이 없어졌다. 야구 기록법이라는 게 뭐 별거겠냐. 길게 잡아 2주 안에 기록법을 마스터하겠노라고 호기롭게 내뱉었다. 친구는 친구대로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할 거라며 분위기를 돋궜다. 이 차로 자리를 옮겨 조금 더 얘기를 나누었나. 친구가 꾸벅꾸벅 졸며 그날의 술자리는 서서히 끝을 보이고 있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