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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 Aug 08. 2023

착각과 현실 그 사이에서

3회 초


야구 기록법을 익히고자 마음먹었던 기간을 이틀 남기고 나름 실전이라 할 수 있는 작업에 돌입했다. 포털 사이트에서 프로야구 중계 하나를 무작위로 택한 다음 실제 기록원처럼 실시간으로 기록을 하는 셀프 미션이었다.


책상을 깨끗이 정리하고 노트북 화면에 프로야구 중계화면을 띄워놓은 뒤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두었다. 흔히 화이트라 불리는 수정액은 액상 타입과 리본 타입 두 가지를 준비했다. 리본 타입의 화이트는 언젠가 사은품으로 받은 것인데 개봉하지 않고 있던 것을 뜯은 것이고 액상 타입의 화이트는 문방구에서 새로 구입을 한 것이었다. 집에서 액상 타입의 화이트를 두세 개 찾을 수 있었지만 오래 사용을 하지 않아서인지 뜨거운 물에 아무리 오래 담가놓아도 제 기능을 회복하지 못했다. 볼펜도 두 가지를 준비했는데 1밀리미터 굵기의 4색 볼펜은 아이가 가지고 있던 두 자루 중 한 자루를 얻은 것이고 0.38밀리미터 굵기의 3색 볼펜은 새로 구입한 품목 중 하나였다.


한국야구소프트볼협회의 기록지 양식을 다운로드하여 A4 용지에 프린트를 해놓은 것은 한참 전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기록 칸이 좁아 보였다. 다른 칸은 그렇다 쳐도 볼카운트를 기록하는 칸만은 너무하다 싶었다. 볼카운트 기록칸의 가로는 선을 포함해 3밀리미터였는데 1밀리미터 굵기의 펜으로는 볼카운트를 나타내는 원과 세모와 같은 기호를 그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0.38밀리미터 굵기의 펜으로 바꾸고 나서는 그나마 칸 안에 기호를 그리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이번에는 세로가 문제였다. 기록칸의 세로 길이는 11밀리미터에 불과해서 아무리 작게 그린다고 해도 기호 다섯 개면 칸이 꽉 차버려 투구가 5구가 넘어가면 어떻게 표시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풀카운트 승부를 한다 치면 파울이 없다고 해도 투구는 6구가 된다. 일명 용규 놀이라 불리는 커트 기술을 시전 하는 선수들은 한 타석에서 10구를 넘기는 것도 예사였는데 이런 경우는 또 어떻게 하나 답답했다. 기록지가 문제인지 내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도 1회 초와 말에는 각각 네 명의 타자 모두 5구를 넘기지 않았다. 2회 초와 말 역시 모든 타자가 5구를 넘지 않는 가운데 삼자범퇴로 이닝이 끝났다. 출루한 주자가 많지 않고 한 타자당 투구 수가 많지 않았음에도 게임은 적당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게임의 초반은 적응하고 관찰하고 준비하는 시간이었기에 선수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다. 하지만 여유로운 그라운드와 달리 모니터 앞의 상황은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2023년 5월 21일 삼성 라이온즈 대 NC 다이노스의 경기.

NC 투수 이재학이 마운드에 오른 가운데 1회 초 선두타자로 삼성의 김지찬이 타석에 들어섰다. 1구와 2구는 볼. 3구와 4구는 스트라이크. 투수가 던진 5구째 공을 타자가 받아치고 1루수가 땅볼을 잡아 1루 베이스를 태그 한다. 이것을 기호로 나타내면 점, 점, 동그라미, 동그라미, 그리스 알파벳 세타, 3A, 로마 숫자 1이 된다. 점은 볼, 동그라미는 스트라이크, 세타는 타격종료, 3은 1루수, A는 1루 베이스, 로마 숫자 1은 첫 번째 아웃 카운트를 나타낸다. 뭔가 많이 적은 듯 하지만 사실은 아주 간단한 상황이다. 그런데 이 간단한 상황을 기록하면서도 일시정지와 되감기를 수차례 반복해야만 했다. 나의 보고 생각하고 기록하는 속도로는 그들의 플레이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웬만큼 숙지하고 있다 여겼던 기호들도 기억이 나지 않거나 헛갈릴 때가 있어 중계를 멈추고 기록법을 뒤적인 것 역시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회 한 회가 지나면서 속도가 조금 붙는 듯하다가도 다시 플레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실제 경기 시간 정도면 되겠지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멈추고 되돌리고 기록법을 찾는 일이 반복되면서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기록을 하다가 물도 마시고 화장실도 가야 했고 심지어는 식사까지 해야 해서 시간은 더 지체되었다. KBO 리그의 평균 경기 시간은 세 시간이 조금 넘는다. 그런데 내가 택한 경기는 하필이면 연장 12회까지 진행된 네 시간이 넘는 경기였다. 세 시간 정도를 예상하고 기록을 시작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들로 다음 날이 되어서야 기록을 끝낼 수 있었다.


경기가 중반에 들어서자 결국 5구를 넘어가는 상황이 나오게 되었다. 옆 칸을 침범하여 타구를 기록하는 수밖에는 없었는데 그나마 다행이라면 10구를 넘어가는 상항은 없었다는 것이다.


1박 2일에 걸쳐 작성한 그날의 기록지를 다시 살펴보니 전체적으로 큰 오류는 없어 보이지만 안타 표시 옆에 4와 3을 적고 중간에 점을 찍어놓은 것만은 무언가 싶다. 외야 안타에 좌중간 우중간 안타는 있어도 내야 안타에 2루 1루간 안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이로 공이 빠져나갔다면 우전 안타가 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어렵사리 기록을 마쳤지만 글자와 기호들로 꽉 찬 기록지를 보고 있자니 왠지 뿌듯하고 영문 없는 자신감까지 생기게 되었다. 사회인 야구에서는 볼카운트를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던 터라 그 정도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자신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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