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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 Aug 30. 2023

이닝의 재구성

4회 초


아수라장이라는 게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일까.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그저 입을 벌린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공을 따라 야수들이 우르르 몰렸다. 어디론가 던져진 공이 빠지고 튀었다. 다시 야수들이 우르르 몰렸다. 공은 또 빠지고 튀었다. 주자들이 뛰고 뛰고 또 뛰어 홈에 들어온 것이 한참 전인데 공은 뒤늦게 홈플레이트를 지나쳐 그물에 박혔다. 스무 명이 넘는 선수들이 저마다 내지르는 소리가 그제야 조금씩 잦아들었다.


완성된 기록지를 사진으로 찍어 친구에게 문자로 보내고 나자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다음 날 친구가 심판을 보는 야구장을 함께 찾았다. 기록지를 쓱 보더니 금방 배우시겠네 한 마디만 했을 뿐 나의 사수가 될 야구장 운영실장은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야구장에 같이 가자는 친구의 말을 들을 때는 그저 야구장에 가는구나라고만 생각했다. 야구를 하려면 야구장에 가야 하니까. 그런데 야구장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주도적으로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고 기록원이 어떻게 훈련받는지도 알지 못했으므로 뭔가 예측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어느 것도 상상하지 않았고 바로 실전 기록을 할 것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할 수 없었지만 어느새 나는 기록석에 앉아 경기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회인야구 구장은 처음이었다. 사회인야구 경기를 기웃거린 적은 몇 차례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흙바닥의 학교 운동장을 빌려 경기를 하던 때라 이런 사설 구장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기록실이 따로 있다는 것도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기록실이 없으면 어디에서 기록을 할까 생각했을 법도 하지만 그저 어디에서든 앉아 기록하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던 것 같다.


홈플레이트 뒤쪽에 컨테이너 반쪽 크기의 구조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구장의 기록실이었다. 크기와 형태로 봐서는 실제 컨테이너일 가능성도 있을 텐데 출입문과 창문을 제외한 나머지 벽체는 검은색 천으로 가려져 있고 그 위에 투명비닐까지 덧씌워져 있어 원래의 모습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움막과 같은 모습이었다. 기록실에는 기록지를 올려두는 테이블 외에도 경기 기록을 입력하는 컴퓨터가 있었고 플레이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지나간 플레이를 되돌려볼 수 있는 비디오 판독 시스템도 갖추고 있었다. 모니터 여러 대가 모여 있는 작은 공간은 어지간하면 스마트한 이미지를 풍기게 되지만 기록실 내부의 느낌은 바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은 스탠드 하나가 실내 전체를 밝히고 있었는데 이렇게 희미한 불빛으로도 낡은 기물들과 청소되지 않은 구석구석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합 시작을 기다리면서 선수들의 이름과 포지션, 등번호를 타순에 맞춰 기록지에 써넣었다. 수비 팀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몸을 풀었고 선발투수 역시 마운드에서 포수를 향해 공을 뿌리며 영점을 조정했다. 오후 여덟 시가 되자 선공팀 1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고 마침내 경기가 시작되었다. 선두 타자는 사구로 1루에 출루했다. 기호로는 HP. 시작은 순조로웠다. 선공팀이 1회에 한 점을 내기는 했지만 2회까지 1대 0의 스코어를 유지하며 양호한 흐름을 보이고 있었다. 다만 기록지 작성 외에 게임원이란 사이트에도 동시에 기록을 입력해야 했기에 마냥 한가하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다.


2회까지 타석이 한 바퀴 돌아 1번 타자가 다시 3회 초 선두 타자로 타석에 들어섰다. 이 타자가 볼넷으로 출루할 때만 해도 곧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나는 알지 못했다. 기록도 별 것 아니네 하는 당치 않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내가 기록을 맡은 첫 경기였음에도 이날의 이 이닝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수많은 경기를 다 기억하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고 이날은 특히 경황이 없기도 했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게임원의 박스스코어를 찾아보았더니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기록지를 보면 훨씬 자세한 복기가 가능할 테지만 기록지는 수중에 없기에 아쉬우나마 게임원의 박스스코어에 입력된 기록으로 3회 초를 재구성해 본다.


선두 타자로 나온 1번 타자가 4구로 출루를 하고 2번 타자 역시 4구로 출루한다. 1번 타자는 출루 후 두 개의 도루, 2번 타자는 한 개의 도루를 기록한다. 3번 타자가 우전 안타, 4번 타자가 유격수 방면 내야안타를 기록하고 5번 타자의 중전 안타에 이어 6번 타자가 좌월 홈런을 터트린다. 1회와 2회를 던지고 3회에도 등판한 선발투수는 이 시점에서 교체되고 구원 투수에게 마운드를 넘긴다. 여기까지 6 득점. 주자가 없는 상태에서 7번 타자가 4구로 출루하고 8번 타자가 좌월 2루타를 날린다. 그리고 9번 타자의 삼진아웃으로 첫 번째 아웃카운트가 기록된다.


이때부터는 사사구의 퍼레이드가 이어진다. 다시 타석에 선 1번 타자는 또 4구로 출루해 도루 하나를 기록한다. 2번 타자 사구, 3번 타자 4구, 4번 타자 4구, 5번 타자 사구, 6번 타자 4구를 끝으로 두 번째 투수가 강판되고 세 번째 투수가 등판한다. 세 번째 투수는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 두 번째 아웃카운트를 만든다. 이어진 타석에서 8번 타자가 우중간 2루타로 진루하고 9번 타자는 4구로 출루한다. 3회 초에만 세 번째로 타석에 들어선 1번 타자는 또다시 4구로 출루하고 2번 타자가 4구, 3번 타자가 중전 안타, 4번 타자가 중전 안타를 기록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이닝은 5번 타자가 유격수 땅볼로 아웃되며 마침내 끝이 난다. 3회 초에만 23명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고 이들을 상대로 세 명의 투수가 등판했다. 이 투수들은 10개의 4구와 2개의 사구를 허용했으며 타자들은 홈런과 2루타 하나씩을 포함한 8개의 안타를 뽑아내며 17 득점을 올렸다. 도루는 네 개에 불과했는데 출루가 스무 번 이뤄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사회인야구에서는 비정상적으로 적은 횟수였다. 선행 베이스에 주자가 꽉 차있어 도루를 할 수 없거나 도루 외의 다른 이유로 이미 진루를 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이 경기의 3회 초를 역대급 이닝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인야구에서도 보기 드문 장면임에는 분명하다. 타자일순을 넘어 타자이순까지 간 이닝은 개인적으로 기억이 없기도 하다.


혼비백산. 혼백이 어지러이 흩어진다는 뜻으로 몹시 놀라 넋을 잃음을 이르는 말이다. 그라운드의 풍경이 아수라장이었다면 나의 내면은 혼이 나간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앞의 재구성된 상황은 수많은 실책성 플레이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안타로 표시된 타구의 상당수가 실책에 의한 출루였고 송구와 포구 과정에서는 실책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더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니 그라운드는 상상 외로 어수선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거라 확신한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다잡고자 했지만 한 순간 경기의 흐름을 놓치자 넋을 놓고 앉아 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수가 기록지의 빈칸을 채워주지 않았더라면 경기가 끝날 때까지 혼이 빠진 상태로 가만히 앉아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덟 시 게임 이후에 시작된 열 시 게임은 10대 5로 끝이 났다. 앞선 경기에 비하면 훨씬 난이도가 낮다고 볼 수 있었지만 한 회에 4~5점씩 득점이 나는 상황에서는 경기를 쫓아가지 못하는 일이 어김없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사수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경기는 열두 시가 넘어 끝이 났다. 이것저것 마무리를 하고 나자 열두 시 삼심 분에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 몸에서 빠져나갔던 혼은 자유로 구간 어느 즈음에서야 제자리로 돌아왔다. 기록실에서 있었던 일들이 장면 장면 떠올랐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자신의 미숙함을 드러낸 것이 얼마만일까. 얼굴이 화끈거리고 자괴감에 빠져야 할 상황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느낌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한 시가 가까운 시간임에도 자유로는 꽤 북적였다. 서울에서 일산 쪽으로 향하는 반대편 차선의 상황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 서울로 향하는 차선에서는 차량의 흐름이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이 시간에 길 위에 있게 된 것일까. 하루를 시작하는 길일까. 고단한 하루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문득 궁금했다. 자신들의 옆이나 앞 혹은 뒤차에 죽을 쑤고 집으로 돌아가는 초보 야구 기록원이 타고 있으리라고 누군들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자동차가 앞으로 전진하는 속도에 맞춰 긴 하루의 남은 시간도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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