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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 Aug 20. 2023

아빠와 캐치볼

3회 말


가부장제. 어릴 적 우리 집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 단어만큼 적절한 것이 없을 것이다. 집안 분위기가 아주 엄격하다던가 강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에게 회초리 한번 맞아본 적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아버지는 쉽게 다가서기 힘든 존재였다. 우리 집만 별났던 것은 아니고 다른 집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시절이었다. 학교에 교장이 있고 회사에 사장이 있듯 가정에는 가장이 있었다. 다른 단체의 우두머리와 달리 가장은 스스로를 가장이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절대 권력자인 가장과 다른 식구들과의 관계는 당연히 수직적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훈계가 아닌 온전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형제들에게 이런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장례식에서 무슨 그런 얘기를 하냐는 듯 반응을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나의 말에 그나마 호응을 했던 것은 바로 위 누나였다. 언젠가 시내에서 아버지를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못 본 척 자기를 지나쳐 가더라며 상복을 입은 누나가 실실 웃었다. 이런 이야기를 불편해했던 다른 가족들은 나와 누나의 이야기를 불만이나 항의의 뜻으로 받아들였겠지만 내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그것이 아니었다. 평생 아버지와 제대로 대면해보지 못했다는 아쉬움. 이제 더는 그럴 기회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장례식장에서의 이박삼일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잠을 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았고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손님이 오면 영정 옆에 서 있다가 맞절을 하고 식사 자리로 안내하는 행위가 끝없이 반복되었다. 삼일 째가 되던 날 새벽 장례식장을 떠나 화장장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아무리 영구차라지만 몇 시간 내내 장송곡만 흘러나오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분위기가 기괴하고도 기괴했다. 그곳에서 아버지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별다른 취미생활도 없었던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는 티브이와 신문을 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예전의 기세도 많이 누그러들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아이들과 대화하지 않았다. 밥은 먹었냐, 왔냐, 잘해라 정도가 오가는 대화의 전부였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내 뒤에서 자전거를 잡아준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것이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다. 그런 추억은 쌓아본 적이 없으니까.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아이가 커 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게 되면서 복잡한 마음이 들었는데 나에게 이런 추억이 없다는 서운함보다는 아버지는 이런 기쁨을 누리지 못했겠구나 하는 안타까움에 더 가까운 감정이었다.


아이가 처음으로 두발자전거를 타던 날을 어떻게 기억하지 못할 수 있을까. 세발자전거에 시큰둥해진 아이에게 두발자전거를 사주고 근처 학교 운동장으로 나간 것은 삼일동안의 연휴 중 첫 번째 날이었다. 자전거를 타는 데는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약간의 균형감각과 운동신경이 요구되지만 두 발로 길을 걸을 수 있을 정도의 신체 상태만 되어도 충분하다. 진짜 문제는 두려움을 극복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다.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으려면 페달을 계속 밟아야 한다. 그런데 초보자들은 발로 땅을 짚을 생각에만 정신이 팔려 페달질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아이는 이 두려움을 이겨내는데 3일이 걸렸다. 연휴의 마지막 날 아이는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을 뱅글뱅글 돌았다.


자전거에 익숙해지고 나서는 한강 자전거길로도 진출하게 되었다. 아이는 자전거를 곧잘 탔지만 취학 전 아동의 집중력은 지속시간이 길지 않았다. 자전거길을 가다 나오는 모든 쉼터에 멈춰야 했다. 고수부지의 놀이터에도 꼭 들러야 했고 나무그늘이 있는 잔디밭도 빠질 수 없는 코스였다. 이 잔디밭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아이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와 넓은 잔디밭에서 캐치볼을 하는 것은 모든 아빠들의 로망 중 가장 큰 로망 아닐까. 그 로망을 실현할 기회가 드디어 온 것이었다.


캐치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아이들이 북적거리는 아파트 놀이터는 캐치볼을 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테니스공이 아닌 진짜 야구공으로 놀이터에서 캐치볼을 하는 부자도 볼 수 있었는데 너무나 위험한 행동을 태연하게 하는 용기가 놀라울 뿐이었다. 캐치볼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생겼고 아이도 어느 정도 성장했으니 드디어 모든 조건이 갖춰진 셈이었다.


그날로 야구 글러브를 알아봤다. 아동용 글러브는 거기서 거기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지만 성인용 글러브는 선택이 쉽지 않았다. 여러 브랜드의 다양한 가격대 글러브 중에서 결국 택한 것이 롤링스 레보 SC950 우투 I웹 11.5인치였다. 커스텀 오더가 아닌 시판 모델 중에서는 최고가에 가까운 글러브였는데 메이저리그 선수 중에도 이보다 더 저렴한 글러브를 쓰는 선수들이 많아 단순히 캐치볼만 하기에는 심한 오버스펙이라 할 수 있었다. 이 글러브를 택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함께 캐치볼을 하던 아빠의 글러브를 어른이 된 아이가 자신의 아이와 캐치볼을 하는데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푸른 잔디밭 위로 하얀 공이 부지런히 오간다. 아빠의 손을 떠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공을 아이가 왼손에 낀 글러브로 정확하게 포구한다. 아이가 던진 공은 때때로 조금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아빠가 끝까지 쫓아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잡아낸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캐치볼을 하던 둘은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는 엄마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이야기하고 아빠는 땀을 닦으며 이런 둘을 흐뭇하게 지켜본다. 나는 이런 그림을 생각했던 것일까. 하지만 상상과 현실은 언제나 다른 법이었다.


아이는 공을 거의 잡지 못했다. 아이가 공을 잡기 편하게 토스하듯이 던져 보기도 하고 공중으로 던져주기도 했는데 어떤 때는 공이 오는 방향과는 다른 곳에 글러브를 갖다 대기도 했고 용케 방향을 맞춘다 싶어도 글러브를 일찍 오므리거나 늦게 오므려 글러브에 맞고 튄 공이 바닥에 대굴대굴 굴러다녔다. 공을 끝까지 보라고 소리를 질러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공을 잡는 것만큼이나 던지는 것도 심각했다. 공은 땅바닥에 패대기 쳐지거나 내가 잡을 수 없는 먼 곳으로 날아갔다. 던진 공을 잡고 그 공을 다시 던져 공이 오고 가는 것이 캐치볼의 기본일 텐데 이런 연속적인 플레이가 전혀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도 시도는 계속 이어졌다. 자전거를 탈 때마다 글러브를 챙겨 캐치볼에 도전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아 아이도 나도 흥미를 잃으면서 흐지부지 끝을 내게 되었다.


야구장에 흔하디 흔한 글러브들을 볼 때마다 길들여지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는 나의 글러브를 떠올린다. 내 키의 반이 조금 넘던 아이는 어느새 나를 따라잡아 내 키보다 한 뼘 정도 웃돌게 되었다. 캐치볼을 다시 시작해 볼 때가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요즈음 종종 한다. 나의 오버스펙 글러브는 아직 건재하며 나의 로망 역시 아직은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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