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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 Jul 24. 2023

프로야구 원년을 기억하다

1회 말


야구 기록에 입문하고 나서 사회인 리그를 운영하는 야구장에서 숱한 선수들과 마주친다. 엘리트 체육이 아닌 사회인 체육을 하는 사람들이니만큼 어느 정도 나이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연령대가 높다는 생각을 매번 하게 된다. 유니폼은 원거리에서 사람을 젊어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지만 가까이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제 나이가 드러난다. 비교적 나이가 적어 보이는 사람들이 아예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인 야구팀은 전반적으로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다 할 수 있었다.


리그의 막바지에 플레이오프 경기가 열릴 때면 선수들의 신분증 검사를 한다. 누가 와서 경기를 하든 본인의 자유지만 엘리트 선수 출신, 이른바 선출을 가려내기 위해 한 명 한 명 이름과 얼굴을 확인하게 된다. 선출의 경우 투수나 포수 포지션에서는 2이닝까지만 경기를 뛰는 것이 허용된다. 선출을 영입해 단기전에서 쉽게 승리를 가져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신분증은 한데 모아 경기가 끝날 때까지 기록실에 보관한다. 두 팀이 경기를 하므로 신분증 무더기 역시 두 개가 된다. 쌓여 있는 신분증을 일부러 들춰보지는 않는데 선수 개개인의 신상정보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고 기록을 하다 보면 그럴 여유가 없기도 하다. 다만 의도치 않게 쌓여있는 신분증 더미에 눈길이 가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몇 경기 연속 맨 위에 있는 신분증의 주인들이 칠십 년대 초반 생이었다.


실제 사회인 야구 현장에서 주축으로 활동하는 연령대 역시 칠십 년대 생이다. 나의 기록원 사수인 야구장 운영실장의 고민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리그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려면 야구팀이 늘어나거나 최소한 현상유지는 되어야 하는데 야구를 하려는 젊은 사람은 점점 줄고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회인 야구의 연령대는 완벽한 역피라미드 형태로 나타낼 수 있고 그 정점에 칠십 년대 생이 있다. 이렇듯 불안정한 연령비가 생겨난 이유로 그는 젊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성향을 꼽는다. 여럿이서 한데 호흡을 맞춰야 하는 단체 경기를 하다 보면 아무래도 이런저런 트러블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것을 참아가면서까지 야구를 하려고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가사와 육아 문제가 더해진다. 예전의 와이프들이 남편의 늦은 귀가와 잦은 외출을 눈감아 줬다면 요즘 젊은 와이프들에게 이는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 된다. 결국 허락받지 못한 남편들은 야구장에 나올 수 없고 이것이 야구 인구의 감소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빠진 게 하나 있다. 칠십 년대 생들은 프로야구 원년 세대다. 이들이라고 체질적으로 단체 경기에 적합한 성향을 지니고 있고 집에서 무한정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 야구를 할까. 이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기를 쓰고 야구장으로 향하는 것은 오랜 세월 그들에게 야구가 로망이었기 때문이다.


1982년 봄. 한국야구선수권대회가 개막했다. 여섯 구단의 선수와 감독이 모두 동대문 야구장으로 모였고 OB 베어스 윤동균이 선수를 대표해 선서를 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시구를 끝내고 나자 심판이 플레이볼을 외치며 마침내 경기가 시작되었다. 삼성 라이온즈와 맞붙은 MBC 청룡이 이종도 선수의 극적인 끝내기 홈런으로 개막전 승리를 거둔다. 프로야구의 시대는 이렇게 탄생했고 동네 골목길은 야구를 하는 아이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국민을 우민화하기 위한 이른바 3S 정책에 의해 프로야구가 생겨난 것임을 이제는 알지만 당시로서는 이런 내막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불과 이 년 전 광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군사정권이 어떤 식으로 국민들을 억압하고 회유하는지는 내 또래 아이들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는 대학 교정 안에 있었다. 학교를 가려면 대학 정문을 지나야 했는데 어느 날 캠퍼스 내의 대학생이 모두 사라지고 총을 든 군인이 교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도시는 평안했다. 삼백 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나라의 반대편 도시에서 말도 되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곳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리그일지라도 아이들은 프로야구를 보며 자라났고 누군가는 그것을 보며 꿈을 키웠을 것이다. 당시 초등학생이었거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을 칠십 년대 생은 프로야구 구단의 핵심 타깃이기도 했다. 프로야구 구단은 너 나 할 것 없이 어린이 회원을 모집했다. 그 아이들이 구단의 열혈 팬층으로 자라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어린이 회원에 가입한 아이들은 구단 로고가 들어간 모자와 티셔츠, 팬북 등으로 구성된 가입 선물을 한 보따리씩 받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구단 로고 모자를 쓰고 티셔츠를 입어도 제대로 된 야구는 하지 못했다. 야구 글러브와 배트를 가지고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동네 야구는 야구공을 테니스공으로 대체하고 배트 대신 주먹으로 공을 치는 손야구가 고작이었다.


이렇게 긴 이야기를 늘여놓은 이유는 나 역시 야구에 대한 로망이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릴 적 손야구의 추억을 잊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사회인 야구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면 나는 한 템포 늦게 기록원으로 그 길을 들어선 셈이다. 그런 야구 따위 좋아하지 않아 말하고 싶지만 그런 야구라도 어느새 좋아하게 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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