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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 Jul 26. 2023

야구와 기호학

2회 초


친구와의 만남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잠만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야구 기록법을 익히기로 한 2주 중에서 이미 하루가 지나있었다. 야구 기록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라 어디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유일한 오프라인 강습인 KBO 기록강습회와 전문기록원 과정은 비시즌 기간인 1월에만 열려 2주 안에 미션을 끝내야 하는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래도 기록법을 찾는 것은 의외로 어렵지가 않았다. KBO 홈페이지에 웬일인지 야구 기록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실제 기록지 샘플도 인터넷에서 내려받을 수 있었는데 이 두 개를 놓고 보니 어떻게 기록을 하면 되는 것인지 대강의 그림이 그려졌다.

야구는 아홉 명의 선수로 이루어진 두 팀이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하는 게임이다. 세 개의 아웃이 나오면 공수가 교대되고 각 팀이 아홉 번의 공격을 하면 경기는 마무리된다. 교체로 투입되는 선수를 포함하면 한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는 아홉 명보다 많아지는데 KBO의 경우 1군에 28명까지 등록할 수 있고 한 경기에 26명이 출전 가능하다. 한 팀에 네다섯 명의 선발투수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실제 한 경기에 투입 가능한 최대 인원을 24~25명으로 봐야 할 것이다. 양 팀을 합쳐 54개의 아웃카운트를 잡고 경기가 끝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세 시간이 조금 넘는다. 야구 기록의 핵심은 이 한 게임 한 게임을 두 장의 종이에 모두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호는 필수가 된다. 2023년 5월 21일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 NC 다이노스와의 경기. 1회 초 투 아웃에 주자 1루 상황. 삼성의 4번 타자 피넬라가 투 스트라이크에서 상대 투수 이재학의 공을 때린다. 이날 티브이 중계를 한 캐스터의 실제 멘트는 이렇다. “5구 째는 높게 뜹니다. 2루수 뒤로 물러서면서 서호철 선수가 건져냅니다. 잔루 1루. 삼성 라이온즈는 출루는 한 명 나오기는 했습니다만 잔루로 남습니다.” 이 상황은 기록지 상에 이렇게 표시된다. F4.  로마숫자 3. 필기체 소문자 L. F는 플라이 아웃, 4는 2루수, 로마숫자 3은 세 번째 아웃 카운트, 필기체 소문자 L은 잔루를 나타낸다. 즉, 2루수 플라이 아웃으로 잔루 하나를 남긴 채 쓰리 아웃이 되었다는 뜻이다.


기호학 혹은 구조주의는 난해한 학문이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이 쉽지 않을 정도로 복잡한 개념으로 가득 차있는 것이 기호학 서적이다. 몇 차례에 걸쳐 몇 권의 책에 도전했지만 결국 포기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와중에 유일하게 건진 기호학 개념이 기표와 기의다. 기호학의 거장 소쉬르에 의하면 인간언어인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나눠진다. 기의는 어떤 대상이 지닌 의미를 뜻하며 기표는 의미를 지닌 대상을 표현하는 명칭을 뜻한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 어떠한 필연적이고 고유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며 이는 한 언어공동체의 자의적인 규약의 산물일 뿐이다. 2루수를 2루수라 부르는 것은 그것이 2루수여서가 아니라 1루수 혹은 3루수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2루수는 영어 second baseman이란 기표와 대체될 수 있으며 deuxième base라는 프랑스어로도 대체 가능하다. 같은 맥락에서 4라는 숫자를 2루수의 기표로 사용하는 것 역시 아무 문제가 없다. 기표가 바뀐다고 해도 기의가 가진 의미는 변질되거나 축소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하면 야구 기록을 하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운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야구경기의 진행 상황을 약자와 도형과 기호로 간략하게 표현하지만 그 내용만은 그대로 전달된다. 야구 중계를 보지 않아도 두 장의 기록지만 있으면 경기 전체를 복기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 같다면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야구 기록지는 텍스트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었다.


새로운 표기법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선수의 포지션과 각 베이스, 타격과 주루, 투구와 포구의 기호들을 조합해 상황에 맞게 기록지에 기재해야 하니 기호를 외우는 게 가장 급한 일이었다. 외워야 할 분량이 아주 많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눈에 익지 않은 것들이라 기록법 전체를 몇 번이나 정독한 끝에야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가 있었다.


이것으로 야구 기록법을 마스터하게 되었는가 하면 그것은 물론 아니었다. 기록법 자체가 암기과목이었다면 진짜 공부라 할 수 있는 이해과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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