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만든 책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을 방문해본 이라면 입구에 이 같은 문구가 걸려있었음을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지옥을 묘사한 신화엔 유독 저울로 망자를 심판하는 장면이 많다. 저승에서 네 번째로 만난다는 오관대왕이 업칭(業秤)에 죽은 이의 생전 죄업과 공덕을 달아 처벌한다는 불교 이야기나, 죽음을 관장하는 오시리스가 망자의 심장과 깃털을 천칭(天秤) 한쪽씩 올려 재본다는 이집트의 이야기가 그렇다. 혹여 독서 지옥이란 게 있다면 살면서 읽은 책을 다 쌓아 올리고 그 무게에 걸맞은 인간이 되는지를 판단하려나. 어쩐지 자신이 없다. 수백 권을 읽어도 한두 권만을 삶에 겨우 소화해낸 만성 장염 환자들이 책깨나 좋아한다는 놈들 중에 많다. 모르는 것도 없지만 제대로 아는 것도 없는 애매한 치들. 자기소개가 길었다.
문장을 뒤집으면 좀 말이 될까. 내 삶의 태도에서 책으로 만들어진 부분보다 내가 찍어낸 책을 죄다 쌓아 올리는 게 더 무거울 거란 소리다. 책 두 권을 낸 작가로서 좋을 때가 언제냐고 가끔 물어오는데 인세 입금될 때를 제외하고는 웬만하면 으쓱해 기분이 난다고 답해줬다. 꿈을 먹고 사는 글쟁이들은 제 통장에 찍힌 더없이 작고 소중한 숫자를 마주할 때 현실감각이 확 치솟곤 하니까. 냉소적인 맛을 빼고 엉덩이 들썩거리게 설레는 때를 하나 꼽아보자면 내 이름 찍힌 책에 사인해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다. 특별히 원하는 문구가 있냐는 물음엔 그저 웃음만 보이니 결국 작가님 뜻대로, 제 돈 들여 산 책 저자의 진정성 있는 일필(一筆)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어떤 형태로든 우리, 나답게 살아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궁극의 자유란 게 있다면 저런 게 아닐까 했다. 반쯤은 아끼는 이가 헤쳐 걸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반쯤은 스쳐 지나가는 이가 넌지시 내 삶에 던져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책 속지에 문장을 남겼다. 삼라만상으로 옷을 바꿔입는 세상, 마음의 안식처라 부를 만한 곳이 점멸하듯 사라지는 세계에서 자기 색을 지키며 산다는 건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벅찰 일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 닿을 수 없는 지점으로의 유랑을 멈출 수는 없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되어가는 존재’로 자신을 규정하며 묵묵히 자기 앞에 놓인 길을 순례자처럼 걸어갈 뿐이다.
양다리는 곧게 펴고 무릎을 붙이고 엉덩이는 힘을 주어 끌어당긴다. 가슴은 펴고 양팔은 곧게 펴 몸의 측면에 붙이며, 어금니를 다물고 턱을 바싹 당긴 채 정면 위 15°를 주시한다. …(중략)… 차렷은 움직이지 않는 자세, 부동의 자세다.
공간을 이동하는 능력은 포유류의 생존에 필수적이지만 실제로 그 동작은 무의식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론적인 이해를 필히 요구하진 않는다. 걸음마를 막 뗀 어린아이가 걸어가는 데는 아무 문제 없지만 인체공학적 지식으로 동작을 풀어 설명하는 건 또 다른 문제임을 우리는 안다.
해군 장교가 되는 사관후보생(OCS, Officer Candidate School) 훈련의 첫 단계는 여타 군사훈련과 마찬가지로 제식 동작을 몸에 익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단정한 자세와 절도있는 동작을 습성화해 품위를 배양시킨다는 목적이지만, 실상은 얼마 전까지 민간인이었던 이들의 육체에서 사회물을 빼고 명령에 거부 없이 복종하게끔 하는 신체 개조의 묘책이다.
몸에 힘을 가득 주고 차렷 자세로 서 있으면 다리는 후들거리고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쥐었던 주먹은 약간의 방심으로도 중력을 못 이겨 풀어지고 수축된 등과 오금은 각기 다른 진동수의 비명으로 화음을 일으킨다. 감시하는 시선의 사각지대에 얼른 들어가야 좀 낫겠는데 이쪽으로 다가오는 훈련관의 군홧발 소리는 포식자가 먹잇감을 끝부분부터 야금야금 뜯어먹듯, 사냥물의 피를 말리운다.
생각해보면 웃길 일이다. 사람이 딛고 서 있는 땅은 초당 29.8km의 속도로 태양을 돌고 있고 몸속 내부의 혈액은 하루에 100,000번 펌프질하는 심장에 따라 순환하는 와중에 차렷 자세는 신체가 갈고리에 걸려있는 냉동 고기가 된 것 같은 흉내내기, 일종의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움직이지 않고 공간의 축에 몸뚱이를 고정하려는 행위는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하며, 비인간적이다. 인간은, 그의 가장 기본적인 과업인 걷기에서조차 자신의 무게를 넘어뜨리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아 올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차례, 이처럼 안정을 흩으며 무너뜨리고 다시 찾을 때 존재는 무엇인가 되어가는 전진을 이룬다. 그러니 누구도 차렷을 하고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건 말부터가 모순이니까.
처음 내 세계가 무너지던 날을 기억한다. 견고했던 믿음의 산에 균열이 가고 태초부터 그 자리에 있던 줄만 알았던 관습의 고목 뿌리가 흔들리던 날, 나는 나를 지탱하던 발판을 끊음으로써 한 발짝 내디딜 수 있음이 더없는 축복임을 어렴풋이 감지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남들이 살아라 정해주는 그런 삶 말고 그저 나답게 살고 싶었다.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남자, 그게 해적왕이라는 「원피스」의 만화 대사처럼 무상(無常)한 생의 바다를 너울거리는 파도 따라, 뱃머리 닿는 대로 누비고 싶었다. 그러다 지난 항해의 궤적을 경험이란 종이에 그려낸다면 제법 멋진 나만의 지도가 될 것이라고.
정해진 답이 없는, 어쩌면 질문부터가 초점이 어긋나 답의 유무조차 파악할 수 없는 문제와 씨름하면서 삶의 방향타를 잡고 어디론가 또 그다음 어디론가 찍으며 나아가 이르렀지만, 나다움의 이름을 끝내 명명하진 못했다. 실체는 하나인데 여러 상(像)으로 나타난 그것은 체코 교환학생에서 여유였고, 에버랜드에서 낭만이었으며, 대학원에서는 오기였다. 어쩌면 그 모든 언어가 실체였을지도 모를 일이니, 나만의 고유한 색을 하나로 표현하기는 여전히 서툴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나 색색의 셀로판지로 몇 장 덧대어 겹겹 쌓은 경험의 퇴적은 특색있는 궤적을 가져 얼추 그럴듯한 항해도의 태를 갖추게 되었다. 적어도 ‘무엇이 되어가는 존재’라는 감은 잡았으니 첫발은 잘 내디딘 셈이다.
친필 사인에 남긴 지향점, 만화 같은 자유를 저자가 끝끝내 손에 넣을지는 그 누가 알까. 스스로 써 내려가는 시나리오일지라도 결말을 미리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서른 언저리에 재입대라는 선택이 나 자신에게 굵은 글씨로 눌러쓰는 질문이라는 점은 확실히 안다. 장염이 끝나갈 때쯤 서서히 찾아오는 평온함이 없다면 평소 건강한 복부의 안온함을 자각할 수 없고 가까운 이의 소중함은 빈자리가 났을 때라야 애절히 다가온다. 고통이 존재하여야 비로소 그 상대역인 기쁨이 존재할 수 있고 영웅을 위대한 영웅의 반열에 오르게 하는 건 그가 구한 시민의 수가 아닌 빌런의 고귀함이다.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군대라는 경직된 조직에 다시 입성한다는 말이 누군가에겐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1기압의 공기처럼 나를 두르고 있는 자유를 피부에서 떼어내어 의식적으로 자각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해볼 만한 출항이 아닐까. 자유는 통제를 조리개 삼지 않고는 볼 수 없고 그 진정한 의미 역시 절제의 미 이면에 기입된 것이라면 나는 지금까지 걸었던 길의 관성을 팔다리와 복근에 묶어 힘을 가득 주고 차렷 자세를 어엿이 해내고 말 테다. 자유가 없는 곳에 굳이 제 발로 걸어 들어가 자유의 의미를 되찾겠다는 모순된 목표 아래서라면, 차렷 자세를 통하여 비로소 앞으로 나아간다는 모순된 방책이라고 말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나만의 보법을 타인에게 말로 풀어내 설득할 재간은 없지만, 내일을 미리 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누구나 어린아이처럼 걸음마부터 시작이다. 걸음마를 떼는 데 어디 이론이 필요하던가.
바로 그렇게,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반대로 평온했던 삶의 무게를 넘어뜨리고 균형을 잡아 다시 앞으로 나아갈 인간이라면 자유도 낭만도 억압, 혹은 부조리마저도 푸른 바다에 녹여낼 수 있을 테다.
하루의 꽃을 새로이 피워낼 수 있음은 누릴 수 있는 복 중 가장 큰 것이라는 말이 있다.
정든 도시를 뒤로하면 뱃고동 소리에 미련이야 한 움큼 묻겠지만,
닿지 못할 그곳에 닻을 올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