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원에 뿌리내린 말을 내 것이라 해요

by 이성진


“좋아하나 봐요, 낭만 같은 거?”


나쁜 뜻이야 있겠는가만은, 야속한 심정이 드는 건 왜일까. 낭만이란 말을 보석함에 넣어두는 이에게 ‘같은 거’라고 할 값싼 종이봉투에 내어주는 형편이 마음 아픈 게 한가지고, 딴에는 당차게 말한 인생 계획들이 사람들 보기에 다소 허황스런 일이나 현실과 거리감 있는 무언가로 비친다는 게 섭섭함이 다음 이유겠다.


“파리에 가서 파티시에(pâtissier, 프랑스어로 과자나 케이크 및 페이스트리 제조에 숙련된 제과사)를 배워보고 싶어요.”

“목동을 생각하고 있어요. 아니 그 학군 좋은 거기 말고, 들판에 소 떼 풀어놓고 피리 부는 목동이요.”

“바다가 나를 불러서 말이죠. 해군 장교로 재입대해서 배 타고 먼바다에 나가볼까 합니다.”


친절한 태도를 일상에 벽지 삼아 도배하는 버릇도 좀 되었다. 섣불리 남의 가벼움을 깎아내리지 않는 여유로움을 품은 이들이 좋았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랐고 그런 사람들이 내 곁에 있기를 소망했으니, 관계의 각축장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내 사람이 되었고 살아남은 나는 그들의 사람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뜬구름 잡는 소리를 늘어놓아도 나의 지인들은 대체로 ‘허허 또 저러다 말겠지’하고 상냥하게 들어주는 편이다. 마지막 포부가 시간표 따라 움직이는 걸 보고는 자세를 고쳐 앉고 진심이냐며 놀라긴 했지만 말이다.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는 게 누구나 가질만한 보편적인 목표가 된다면, 수단의 어휘집에서 내가 책갈피 넣어놓은 쪽은 낭만이 맞다. 원래부터가 낭만을 좇아 뛰어왔다기보다는 포레스트 검프처럼 정처 없이 뛰다 보니 낭만이 가는 길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가던 길의 이름이 낭만이었구나 하고 받아들였을 뿐이다. 말하자면 낭만이 가득한 것만 하고 싶다는 ‘적극적 낭만 추구’라기보다는 낭만이 없으면 선뜻 손이 가지 않더라는 ‘소극적 낭만 추구’가 될까.


한 지붕 아래서 사는 식구라고 입는 옷이나 듣는 노래가 한가지일 순 없는 것처럼, 낭만적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라고 흔히 생각되는 이미지대로의 전형적 인물로만 나열될 수는 없다. 전형적(typical)이나 정형화된(stereotypic) 이미지라는 것은 본디 제각기 다른 것을 묶어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소통의 도구일 따름이라 틀에 완벽히 부합하는 개체라는 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낭만 좇는 사람들 다 비슷비슷하게 살아가더라며 넘겨짚는 자세는 마치 해 질 녘 하늘에서 파랑 노랑 빨강이 시시각각 자리를 바꿔가며 파스텔 빛으로 물들어가는 다채로움을 감지하지 못한 채 노을색이 그저 노을색이지 하는 것과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추구하는 사람 편에서도 낭만을 좋아한다는 담백한 고백은 어딘가 심심한 감이 있다. 말이라는 게 입 밖에서 굴러다닐수록 생각을 구체화하는 힘이 있는지라, 어쩌다 낭만에 끌렸다든가 어느 부분이 특히 맘에 들어 삶의 태도로 낭만을 삼게 되었는지를 표현할수록 자기만의 낭만은 옷을 차려입는다. 비단 뒷마당 정원의 묘목뿐 아니라 남에게서 빌려온 태도는 신경을 쓰고 가꿔줘야만 비로소 내 것이다. 남의 언어를 내 땅에 뿌리 내리려면 수고가 필요한 법이니까.


어쩌다 낭만을 자기 것이라 확신할 수 있게 됐는지, 대학원 연구실 동료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은 기억이 있다. 질리도록 풀었던 에버랜드 이야기를 연구실 회식 자리에서 예쁘게 포장해 재차 내놓는 한편, 석사 학위를 따고는 군대를 다시 가려 한다는 의중을 밝힌 날이었다. 지도교수님과 동료 몇 명 정도에만 넌지시 그럴 계획이라고 일러두었던 차라 대다수에겐 귀를 의심할 만한 폭탄과도 같은 선언이었다.


튀어나온 부분이 있으면 도드라져 보이기 마련이고 도드라진 부분은 더는 무난한 배경이 아니게 된다. 조경 아뜰리에와 대형 건설사 조경팀의 장단점, 석사급 연구원으로 들어간 뒤 박사과정을 밟을 것인지 처음부터 박사까지 끝내고 연구원에 들어갈 것인지 등의 주제가 오가는 자리에서,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 수평선에 해가 걸려있는 모습을 기어코 보기 위해 재입대를 하겠다는 발언은 공간의 문법에 한참 어긋난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막 연구실의 일원이 된 이들에게는 호기심을 자아내기 충분한 소재였겠지만.


“세상 사는 데 딱히 의미 둘 데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나중에야 들은 거지만, 얘가 무슨 소릴 하나 싶었다고. 낭만적 태도의 기원을 물었으니 형형색색으로 삶을 개척하는 비결 따위가 나올 줄 알았던 이로선 황당할 법도 하였다. 많은 것이 맥락 사이에 숨어있는 말은 초면에 건네기에 적절치 못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뼈대만 남은 문장에 차근히 살을 붙여주긴 했다.


의미가 없는 세계. 당연하게 여겼던 삶의 의미들을 부수고 나니 나에겐 그게 남았다. 정확히는 (나를 거치지 않고 내 삶에 먼저 주어진) 의미가 없는 세계라 할까. 무의미의 토양에 낭만이 웬 말인가 싶지만, 오히려 그런 땅에서야 제 모습대로 잘 자랄 수 있다고 본다. 가지치기하지 않고 자란 배롱나무는 구부러지면 구부러지는 대로, 땅에 끌리면 땅에 끌리는 대로 자유롭게 공간을 점유하며 몸을 뻗친다. 지지대가 없는 땅에서 식물은 흔들릴지언정 자기 모양을 쉬이 양보하진 않으니까.


어릴 적 살던 옛집을 촌스럽고 부끄러운 것으로 홀대할지 고풍스러운 유산의 흔적으로 아껴줄지는 각자 앞에 놓인 몫이다. 파괴와 창조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서로가 있기에 가능한 작용이다. 부수어 흩지 않는다면 어찌 자기만의 성을 쌓아 올릴 수 있을 것이며 반대로, 세계의 틀이 자기 삶을 모두 덮을 정도로 견고했던 적이 없다면 어찌 그것을 진심으로 부술 수 있겠는가.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던 「데미안」의 말은 감히 세계라 부를 만한 껍질이, 적어도 한때는 자기 삶의 경로와 바람직한 길을 설명해줄 수 있을 만큼 선명했던 이정표가 있던 이에게만 울릴 수 있다.


내 영혼이 말하지 않는 방식, 종교와 사회가 선(善)이라 이름한 가치가 삶의 의미로 가득 차 있었던 시기를 원망하진 않는다. 지금 알았던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삶이 조금은 더 일찍 윤택하게 채워지지 않았을까 하는 탄식 누가 아니 했을까. 더 일찍 영혼의 명령에 따라 자유롭게 삶을 헤쳐나가는 법을 왜 나는 알지 못했는가, 미래에 묶인 현재가 아니라 오늘로 오롯이 빛나는 현재를 맞이하는 법을 왜 나는 몰랐는가 하면서 후회의 초를 태웠지만 쌓인 촛농에는 불을 붙일 수 없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서 나는 어쩌면 지금 알았던 것을 그때 알았을지도, 몰랐을지도, 반만 알았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 세계의 과거 경험과 느낌의 경로 배열에서 어느 하나 어긋난 세계의 나는, 마치 DNA 단백질 배열 순서가 달라진 세포의 기억처럼, 내가 아닌 무언가일 뿐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시간선의 각본에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이 경로를 거쳤기에 나는 진정으로 나일 수 있음을.


“우리 애도 나중에 커서 이랬음 좋겠네.”

연구실 동료, 일곱 살 남자아이의 엄마인 그녀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니었을까.


누군가에게 낭만은 지나간 것들에 대한 사랑이자 오지 못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누군가에게 낭만은 가까워질 수 없는 대상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동경이자 이루지 못한 합일에 대한 슬픔이다. 내 만년필로 쓴 낭만은 의미랄 게 도무지 없는 세계에서 권태와 무기력을 딛고 삶을 긍정해내는 여정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되지 않음으로써도 모든 것이 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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