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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MITAGE Jan 04. 2024

먹어야 돼, 고기국수

제주도 제주시 장수물식당



고기국수, 꼭 먹어야 돼?” 

친구는 퉁명스러웠다. 

으레 제주라면 혼자라도 챙겨 먹던 메뉴를 

기왕 같이 온 오늘까지 소화해야겠냐는 말이었다.


여기서만 견딜 수 있는 슴슴함을 한 번은 느끼고 돌아가고 싶었다. 알 수 없게 미묘한 개운함을.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이 작고 거대한 섬에서. 하루가 아쉬운 여행지에서 육지로 돌아오기 하루 전날밤, 얼큰하게 마신 와인을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레 공기 중으로 배출해야 했다. 입술은 오래전에 보랏빛으로 물들어있었고 뜨거운 숨을 토했다. 낯선 곳에서 날아와 제주도를 거니는 살아 움직이는 디퓨저였다.


뜨끈하면서도 든든한 것이 필요하다.’



머릿속이 맑은 국물처럼 하얘졌다. 기운을 차릴만한 단백질. 건강한 기름기를 포함한 약간의 느끼함. 본능이 당기는 고열량이었다. 육지에서 섬으로, 갑작스러운 방문은 금세 제자리로 돌아와야 했지만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몇 번을 헤아려 봐도 얼마 되지 않는 끼니에 심심한 국수를 태운다는 건 모두를 만족시키는 데 있어 적지 않은 리스크를 동반할지도 모르겠다. 돌아와 생각하면 벌써부터 아쉬울지도 모를 기억으로, 쟁쟁한 선택지에선 조금 뒤편에 세워두었다. 선택의 한 발, 한 방이 소중했던 건 여러 날을 머물던 어느 때의 여유로운 일정과는 달리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좋아하는 것으로 챙길 수 있을까. 반드시는 아니지만 문득 생각났다. 생각보다 고가인 평양냉면 집엘 가서 필사적으로 이름을 적어 올려 한참을 기다렸다 먹고는 초심자였던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집으로 돌아간 어느 날, 변기 커버를 올릴 때 그 맛이 불현듯 생각나는 것처럼 자극 없는 슴슴함이란 뜻밖의 타이밍에 비로소 알게 되는 치명적인 매력이라는 사실을. 



제주의 쟁쟁한 메뉴들 사이에서 고기국수는 유별나게 화려하다 할 음식은 아니다. 어쩌면 돌아온 육지에서 별생각 없이 뜨끈한 국물의 무난하다 못해 지극히 평범한 멸치국수를 고르는 것처럼, 때론 해장 라면처럼 익숙하게 떠올릴만하면서도 가볍게 고를 수 있는 메뉴다. [장수물식당]은 아니지만 다른 식당에선 지독한 코로나 시절 24시간을 운영을 잠시 멈추기도 했지만 '고기국수'는 여전히 이곳 사람들의 해장과 동시에 안주가 되기도 하는 진격의 주당 메뉴라는 소개를 현지 사람에게 듣기도 했다. 



술에 얼큰해지기 시작했을 때 동시에 허기도 시작되는 지점에서 들르는 서울의 어느 감자탕 집과도 비슷한 설정이라는 생각에 조용히 공감했다. 알코올에 지배당한 뇌가 거대한 허기를 채우기 위해 때때로 패스트푸드를 찾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뽀얀 국물 가운데 놓인 국수 위에 얹은 삶은 고기의 투박함으로 승부하거나 때때로 거들뿐인 김치에 대한 기억으로 좌우된다. 반찬으로 맛보기 돔베고기를 일부 경험할 수 있다거나 하는 구성에 따라 식후 최후의 만족도가 달라질 수 있다. 한결같은 선택에 일시적인 저항으로 비빔국수라는 변주로 이어질 때도 있었지만 곧장 후회했다. 붉은 양념장으로 슥슥 비빈 '비빔 고기 국수'를 고른 날이면 슴슴치 못한 마무리로 끝이나 그랬다. 


붉은 양념장의 기원은 대체로 비슷한 걸까.’ 


육지로 건너와 마주한 하얀 국물에선 ‘’ 자로 시작하는(탕으로 끝난다) 라면의 수프, 가루 맛 같은 게 느껴졌다. 요즘은 가루 요리사가 추앙받기도 하지만 인스턴트 라면을 즐기지 못하는데서부터 시작한 부자연스러운 접근이었다. 익숙하기에 도무지 무슨 음식이라 말하기 어려운 애매한 맛이다. 육지에서 겪은 여러 고기 국수는 섬과 달리 깊이 없는 맛으로 때때로 아름다운 푸른 기억이 변질될뻔하기도 했다. 홍대와 상수를 사이에 두고 찾아갔던 몇몇 곳들이 떠올랐지만 코로나 이전부터, 여러 가지 환경 변화에 여러 사람들까지도 발길이 닿지 않기 시작했다. 얇아진 고기에 간신히 붙잡아 뒀던 잊혀 가던 매력이 두툼해지지 못하고 점점 더 옅어진다 생각할 때쯤이었다. 그리고 서울 어디에서도 흔하기 어려운 진짜 '고기국수'라는 이름의 메뉴가 보기에서 희미하게 사라졌다.  


그런 절박함에 현지에서 마무리 정화 작업은 필요했다. 굳이 고르고 골라 간 곳은 아니었지만 늘 가던 곳을 피하기로 했다. 돌아가야 하는 공항 근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섬 이곳저곳에 있는 그런 가게는 아니었다. 슬리퍼를 끌고 조용히 나와 누군가는 식당에서 혼밥을 하고, 관광객이든 제주사람 어느 누구든 비질을 하며 잠시 기다렸다 들어오라고 하는 모습은 소탈해 보였고 기대하던 슴슴함과도 잘 어울려 보였다. 이럴 때면 여행지에 와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실감한다. 자극 없는 시간에 잠시 들린 곳에선 낯섦에도 편안함 마저 들었다. 날은 좋았고 김치 생각은 더욱 간절했다. 


대단하게 특별하지 않다고 해도 그런 메뉴를 고를 수 있어 다행이다. 하루를 최선을 다해 먹어도 소화할 수 있는 절대적인 양은 정해져 있지만 마침, 무난하고 담백해야 할 차례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걸 골랐다. 다시, 사라졌던 고기 국수를 선택지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  



EDITOR

:HERMITAGE

BY_@BIG_BE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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