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자리:夢兆

조짐과 징조, 뒤를 따르는 꿈의 해석

by HERMITAGE

IMG_3211.JPG

눈을 감고 있는 동안은 조정된 시력으로 애쓰지 않아도 보였다. 거기엔 실제 하지 않았던 일들까지, 꼭 그랬어야만 했던 것처럼, 선명했다. 현실이 왜곡되고 있을 때, 실제 했던 기억은 흐릿한 정도로 희석되었지만, 아주 새롭게 지워지지는 않았다.


'좋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건 어떤 걸로 결정되어야 하는 걸까.'


눈앞이 뒤섞일 때, 장면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내가 그 그림을 보고 그때 뭐라고 말했던가? 사실 별로 대단하다고 느끼진 않았지만 좋게 이야기해 줬지. 짐짓, 아주 놀란 체를 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어. 단지 그렇게 하고 싶었을 뿐이지. 오늘 보니까 정말 그렇네. 내가 그때 왜 그렇게까지 좋게 이야기를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단순한 착각인가? 아니야, 아닐 거야. 착각을 한다고 해서 그걸 꼭 입 밖으로 말할 필요는 없잖아. 오, 그래. 차라리 옆에 있는 이게 더 나아 보인다. 차라리 이게 나아, 그래, 이건 언제 그린 그림이지?"


"그건 19살 때 그린 그림입니다. 아마 그때이지 싶은데요, 눈을 뜨고 있을 때의 대부분은 한숨을 쉬고 있었을 때라 그런 그림이 나왔나 봅니다.


"하하, (웃음) 그때부터 그렇게 심각했어? 왜 그렇게 한숨을 쉬었을까. 사는 게 별게 아닌데 말이야. 결국은 다 원래 자리로, 맞는 곳으로 흘러가게 되어있어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돼, 거기서 거기인 거야. 그 자리가 그 자리라는 거지. 이 그림처럼 말이야, 그때는 그렇게 대단한 그림인 것처럼 떠들었지만 지금 별 볼일 없잖아? 하지만 이 뒤에 있는 그림을 봐, 오늘은 이게 더 대단한 그림 같아 보이는걸. 그렇다면 이게 더 대단한 게 되는 거야. 다른 일도 마찬가지야.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되는 거야."


"당시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결국엔 다 비슷하게 끝나는데. 뭘 그렇게 마음을 졸이냐고."


‘앞서 좋다고 했던 그림은 기괴하기 직전까지 彩色(채색)한 인물화였고, 오늘에서야 이야기하는 이 그림은

習作(습작)처럼 보이는 흰 바탕에 초록색의 넓은 잎이 서너 가닥 그려진 비교적 평범해 보이는 식물화였다.’


어떤 그림이 더 나은지를 따져보기 전에 왜 이 그림이 지금 한 공간에, 그것도 방 한구석에 놓여있는지 의문이었다. ‘정리를 하려고 잠깐 꺼내놓은 거겠지’ 하고 있을 하필 그때 들킨 것처럼 그림에 눈이 마주친 것이다.


"그랬겠지, 했던 말을 또 비슷하게 했구나. 그래서, 어디로 가게 되었다고? 이제 결정이 된 건가, 아주 그렇게 하게 된 거야?"


"그곳은 크게 두 개로, 서로 다른 곳에 분리되어 있습니다. 아직 어디로 가게 될지는 아주 정확하지 않지만, 아주 멀리는 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가까운 곳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꽤나 외딴곳인 건 맞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못 갈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에요."


"그래 어디가 되었든 잘 된 일이야. 아주 만족할만하다 할 순 없지만 그렇게라도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난 어떻게든 해낼 줄 알았어.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 막상 거기가 아주 먼 곳이면 또 어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상심해서는 안 돼. 주변에서 오히려 더 수군거릴 수도 있겠지. 그런 것에 휘둘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확신이 없어서가 자신감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옅은 미소였다. 누군가 이런 말들을 해주기를 바랐던 사람처럼. 일단은 괜찮다, 잘 될 거야, 라는 말에 약해진다. 의도를 믿어서가 아니라, 막연한 기대에 감정을 편승하는 기분이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몰입하기 어려운 긍정적인 사고를 처음부터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도 비슷한 척 흉내 내고 싶지 않다. 하라고 해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옅어진 감정 뒤로 숨었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널브러진 그림들. 채색했던 흔적이 바닥에 떨어져, 사방에 흩어져 있음에도 발바닥에 까슬하게 쓸리고 무디게 밟히는 것들을 무시한 채로, 밝지만 어두운 주변을 가리고 선 덕분에, 그때만큼은 빛에서 자유로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날이 밝았다.


Hermitage

@big_beom

이전 19화운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