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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Sep 09. 2019

새벽에 당당히.

몰래 쓰지 않는 글...

 9시부터 몹시 피곤했는데 아직까지 잠이 오지 않는다. 조용히 설거지를 마치고 고단했던 하루를 마무리하려고 침대에 누웠다. 환절기가 되어 하루종일 건조한 두 눈을 감았더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죽을 것 같았더라면 잠들었겠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깨어있고 싶고, 생각하고 싶고, 말이 하고 싶어 근질거렸다. 오롯이 혼자서 차지하게 된 침대를 마음껏 누비며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봐도 역시 잠이 오지 않았다. 남편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뒤척여도 되고, 그의 코골이에서 온전히 해방된 밤이건만 오늘 밤에는 잠이 오지 않는다.


 오후 5시쯤 출장 가는 남편의 기차 시간을 기다리느라 잠시 카페에 들렸다. 친구의 추천으로 한 번 갔던 카페였는데 첫 방문 이후 벌써 5번째였다. 커피 맛이 어차피 거기서 거기라는 남편에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주고, 나는 여기 아니면 이 맛이 안난다며 크림 모카를 시켰다. 원래 카페인이 잘 받지 않는 체질인데 달달한 커피 음료의 맛에 눈을 뜬 이후로는 매일 한 잔이 고팠다. 며칠 만에 마시는 커피라 그런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아침부터 심드렁했는데 크림 모카 한 모금이 들어가자마자 누가 볼살을 잡아당긴 것처럼 웃음이 났다. 남편은 커피 한 모금에 느닷없이 해맑아진 내 표정을 보더니 덩달아 웃었다. 어찌되었든 커피 한 잔으로 둘 다 웃었으니 본전은 뽑고도 남았다. 


 카카오맵을 켜서 우리가 있던 홍대 카페에서 서울역까지의 이동시간을 찾아봤더니 30분이라고 떴다. 남편은 기차 출발시간 1시간 20분 전에 카페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출발해야한다며. 7년의 연애와 2년의 결혼생활이 아니었다면 분명 내가 싫어서 일찍 헤어지려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편을 지하철 개찰구까지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갔다. 막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는데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아놔, 벌써 서울역임." 읽자마자 어찌나 웃기던지 최대한 많은 'ㅋ'를 찍어서 그에게 보냈다. 그리고 순간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문명의 발달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겨우 500미터를 걷는 동안, 그는 5000미터 이상을 이동한 것이다. 그는 누가 30분 걸린다고 했냐며 볼멘소리를 했다. 앞으로 꼬박 1시간을 기다려야하는 남편에게 "그래도 늦은 것보단 낫지"라고 했다. 분명 남편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음에 또 똑같은 상황이 생기더라도 그는 비슷한 시간대에 역으로 출발할 것이다. 암, 그래야 우리 남편이지.


 집에 와서는 저녁을 차려먹고 최근에 중고거래앱으로 무료나눔을 받은 소파에 앉아 넥플릭스를 봤다. 공짜라서 너무 좋은데, 개냄새가 없어지지 않는다. 다음에 가구를 중고로 얻을 땐 꼭 애완동물을 키우는지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강아지가 눈물나게 귀엽지만, 나는 절대 애완견을 키울 수 없을 것이다. 드라마에 한참 몰입하다가도 개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면 현실로 돌아온다. 소파 쿠션을 모두 떼어내고 구석구석 숨어있던 강아지털을 모두 청소기로 빨아드렸고, 베이킹소다를 전체적으로 묻혀서 닦아보기도 하고, 섬유탈취제도 몇 번 뿌려봤지만 냄새는 여전했다. 세상을 살기위해서는 생각보다 더 다양하고 자질구레한 지식이 필요하다. 소파를 하나 들이는 것에도 얼마나 많은 깨달음과 배움이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잠이 오지 않는게 아무래도 오후에 마신 커피 때문인 것 같다. 억지로 잠을 청해보려고 했지만 심심함을 참기란 잠들기보다 어렵다. 자기 전 핸드폰이 얼마나 수면에 방해가 되는지 알면서도 숫자만 세며 누워있기가 어찌나 좀쑤시던지 결국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유투브를 켰다. 그 동안 내가 봤던 동영상들과 유사한 추천 영상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비빔국수 레시피, 수영 배우기, 메이크업 노하우, 다낭 여행팁, 코미디빅리그 레전드 동영상등이 가득했다. 딱히 보고 싶은게 없어서 샘김 노래를 찾아 들었다. 샘김은 첫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기도 했고 그때 그 애의 나이와도 비슷하다. 새벽에 샘김의 목소리와 기타연주를 듣고 있자니 배가 간지러웠다. 그때 그 시절에 설레였던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감정은 그때와 같은데 현실에서 누워있는 사람은 서른중반의 여자라니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또 잠이 싹 달아나서 멀뚱이 천장을 바라봤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수면유도음악으로 선곡을 바꿨다. 파도소리나 시냇물 소리를 배경으로 잔잔한 피아노곡이 흘렀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것 같았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은 기분으로 40분짜리 음악을 끝까지 들었다. 5분이면 골아떨어진다더니 댓글에는 나처럼 강인하게 이 음악을 이겨낸 사람이 제법 많았다. 그들의 댓글을 몇 개 읽으며 위안을 삼았다. 정해진 수순처럼 나는 결국 컴퓨터 앞에 앉는다. 수많은 불면의 밤. 그 끝은 언제나 몰래쓰는 글이었다. 어릴때는 같은 방을 썼던 친언니가 깨지 않도록 몰래 일어나 글을 썼고, 결혼 후에는 잠귀 밝은 남편 몰래 일어나 살금살금 컴퓨터가 있는 작은방으로 기어나왔다. 하지만 남편이 출장을 떠난 오늘 새벽, 나는 당당히 걸어나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두들기는 타자의 맛은 참으로 똠얌꿍이다. JMT(존맛탱)이다. 요새 남편과 나는 뭐만 했다하면 "~ 똠얌꿍이다"라고 한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도대체 왜 똠얌꿍인건지 모르지만 둘 다 귀신같이 서로의 맥락을 파악한다. 좋아도 똠얌꿍, 싫어도 똠얌꿍, 짜증나도 똠얌꿍, 지쳐도 똠얌꿍이다. 남편은 똠얌꿍 맛도 모르고, 나는 일생에 단 한 번 그것도 단 한 숟가락 맛본게 전부인데도 서로가 말하는 똠얌꿍의 맛을 기가막히게 알아맞춘다. 남편은 나없이 행복하게 잘 자고 있나 모르겠다. 일 년전만해도 남편이 하루만 집에 없어도 우울하고 보고싶고 얼른 출장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틀까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결혼 30년차가 되면 과연 내가 남편 얼굴을 안보고 며칠을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다. 


 새벽에 당당히 쓰는 글이지만 역시나 이 글도 '쉿, 남편한테는 비밀이야' 폴더에 넣어야겠다. 남편이 읽어도 상관 없지만 비밀로 해두는 것이 더 짜릿(?)하다(=글쓰는 맛이 좋다). 그런면에서 남편이 평소에 책을 거의 안 읽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이 책이 출간되더라도 내가 밝히지 않는 이상 남편이 찾아 읽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읽을 일은 없겠지만 보험용으로 한 마디만 하고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여보, 보고싶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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