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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Sep 29. 2019

극한추석(친정편)

시댁과 친정, 두 가족이 추석을 보내는 방법

극한 추석(친정편)


 부모님이 오시기 몇 시간 전부터 남편과 대판 싸울 뻔 했다. 상황은 이랬다. 밤늦게까지 핸드폰을 하다가 자는 것이 일상인 우리 남편은 출근을 하지 않는 이상 아침 10시 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오시기로 한 이번 추석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침 7시쯤 눈을 뜬 남편은 나에게 물었다.


"여보, 아버님 어머님 몇 시쯤 오신데?"

"글쎄, 그래도 아침 9시 전에는 도착하시지 않을까?"

"9시? 하아..... 왜 이렇게 매번 빨리 오시지? 좀 늦게 오시라고 하면 안돼?(짜증 짜증)"


 남편의 마지막 말에 확 기분이 상했다. 물론 나도 아침잠이 많은 관계로 부모님이 일찍 오시는게 부담스럽지만 내가 우리 부모님한테 짜증을 내는 것과 남편이 짜증을 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항상 새벽 5시쯤 일어나시는 분들이고 우리 엄마가 딸들을 보는 날을 얼마나 학수고대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침에 조금 피곤한 것 정도야 기꺼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분이 나빠서 입을 닫아버리자 방금 했던 말이 미안했는지 남편은 "아잉, 그냥 자기한테 푸념도 못하냐?(애교 애교)"라고 콧소리를 냈다.

 나는 남편이 저럴때 진짜 얄미워 죽겠다. 아무 생각없이 배려심 없는 말을 툭툭 내밷고는 내가 기분이 상하면 0.1초만에 애교를 부리며 아양을 떤다. 무슨 지킬앤하이드도 아니고 왜저러는지 진심으로 모르겠다. 기분은 이미 상해버렸는데 몇 초도 안되서 저런 태도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화를 안 풀기도 찝찝하고 화를 풀기도 억울하다. 일관성 없이 확확 바뀌는 그의 태도는 참으로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고 더불어 그를 향한 나의 인내심은 점점 일관성을 잃고 있다.


 결국 8시 반쯤 도착하신 우리 부모님에 의하여 남편과 나는 잠정적 화해를 했다.

 우리 부모님은, 특히 우리 아빠의 주식은 밀가루다. 60대 한국 부모님 세대에게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식성이다. 부모님을 똑닮은 나와 우리 언니도 물론 빵과 면이라면 환장을 한다. 하지만 왜 한국인은 글루텐을 그렇게 소화 못 시키는 것 일까. 밀가루는 우리 가족에겐 축복이자 저주다.

 평소 건강을 위해 밀가루 음식을 덜 먹으려고 노력하는 우리 네가족은 남몰래 명절을 기다린다. 서로의 기호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딱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7년 전쯤 귀농하신 우리 부모님은 피자, 스파게티, 빵과 각종 면요리들과 거리있는 삶을 사시게 되었다. 그래서 명절이되면 그럼 음식들을 파는 가게가 지척에 있는 서울로 친히 올라오신다. 자신은 한 번도 부모님과 한식 이외의 음식을 밖에서 사먹어본 적이 없다는 우리 남편에게는 너무나도 놀라운 경험이라고 했다.

 

 곧이어 언니네 식구들도 우리집에 도착했다. 이때가 아침 9시경이었다. 남편은 애써 피곤한 기색을 감추려 했지만 평소에도 짙던 다크서클이 볼까지 내려와 있었다.

 6살난 조카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서로서로의 안부를 묻는 동안 엄마는 시골에서부터 가지고 온 짐을 풀고 갖은 반찬을 냉장고에 정리했다. 한바탕 인사가 끝나자 아빠는 초조한 듯 식탁에 앉아 그 두툼하고 햇볕에 그을린 투박한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앞니를 반복적으로 톡톡톡톡 쳤다. 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무슨 생각이 떠올랐을 때 하는 아빠만의 습관이었다. 언니는 본능적으로 아빠의 마음을 알아챈다.  

 "아빠,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지금 카페 열었나?"

 언니는 아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갈 채비를 한다. 이 둘의 방랑벽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따라서 쉬는 날 집에만 있는것은 이 둘에게는 형벌이나 마찬가지이다.

 엄마는 한숨 돌리고 나가자고 하지만 아빠와 언니에겐 씨알도 안 먹히는 이야기다. 우리는 넓직한 카페 공간이 있는 근처 파리바게트로 향한다. 커피와 빵이 있는 장소, 아빠에게 이보다 더 완벽한 곳은 없다.

  진열된 빵을 구석구석 구경하고 자신이 고른 설탕이 가득 묻은 꽈배기빵을 행복하게 먹는 아빠의 모습은 흡사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자동차 모형을 손에 쥔 7살짜리 아이다. 누구도 그 순간만큼은 그 아이의 행복을 앗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아우라랄까, 그런게 느껴지는 모습이다. 늙어서 자꾸 눈물이 고인다는 아빠의 두 눈동자는 빵 앞에서 더욱 초롱초롱 빛난다.

 어느 카페에 가든, 어느 빵집을 가든 아빠가 그 곳에서 만족하는 시간은 최대 2시간이다. 그 장소에 온지 두 시간이 가까워가면 또 다시 아빠는 자신의 턱을 괸 왼손 검지손가락으로 앞니를 톡톡 거린다. 옮길 시간이다. 파리바게트에서 나오기 전 우리는 어디에서 점심을 먹을 것인지 의논했다.

    

 우리 7명은 동묘행 전철에 몸을 실었다. 동묘로 장소가 정해진 것은 전적으로 아빠의 의견이 관철된 결과이다. 저렴한 가격에 식사를 할 수 있고 덤으로 관광까지 한 큐에 끝내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는게 아빠의 설명이다. 남몰래 아연실색하는 남편의 표정을 보자 조금 안쓰러웠다.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집에 다시 돌아와 잠깐 쉴 수 있겠지했을 남편. 순진하긴, 이제 시작이야.


 동묘시장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추석연휴 전날이라 그런지 게걸음을 걷지 않고도 편하게 이동할 수 있을 정도였다. 평소보다 한산할지라도 동묘시장이 내뿜는 아우라는 그대로였다. 너무나 다양한 색들이 두 눈으로 쏟아져들어와 정신을 쏙 빼놓았다. 천천히 걸으며 각양각색의 물건들을 구경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와중에 우리 가족은 쉴새없이 아빠를 찾았다.


"아빠 어딨어?"

"니 아빠 어딨니?"

"할아버지 어디있어요?"

 "아버님 어디계시지?"


 아빠의 아담한 키, 태양에 그을린 피부, 듬성듬성한 머리숱, 원색의 티셔츠와 짙은 회색 등산바지. 이 모든 조건은 아빠가 동묘시장이라는 생태계에 섞여들기에 최적이었다. 아빠가 바닥에 죽 늘어선 신발들을 구경하고 서있으면 누가 상인이고, 누가 아빠인지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다. 부여에서 수박을 키우고 설탕 뿌린 꽈배기를 좋아하는 귀여운 60대 농부 박모씨는 동해 번쩍 서해 번쩍하며 동묘시장을 누볐다.

 한 시간 반 뒤, 우리 가족은 고기튀김과 비빔국수를 먹기 위해 다시 모였다. 열심히 시장을 누빈 우리 가족이 그곳에서 구매한 물품의 목록은 이러하다. 하나뿐인 손녀딸이 좋아하는 거라면 십원 한 장도 아깝지 않은 우리 엄마가 산 핑크색 미니마우스 손목시계 하나, 남들이 뭐라하든 마이웨이 스타일을 고집하는 우리 언니의 베트남 귀부인 스타일 구제 블라우스와 치마, 쇼핑은 무조건 만원 이하가 답이라는 우리 아빠가 산 두 켤레의 만원짜리 운동화, 오 천원짜리 메이커 카라셔츠와 벨트. 형부와 남편 그리고 나도 각자 구매 충동은 느꼈으나 끝까지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동묘시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시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니 오후 3시가 넘어있었다. 남편보다는 쌩쌩했던 나도 그쯤되니 낮잠이 간절했다. 적당히 때를 봐서 방에 들어가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빠가 대뜸 "요새 극장에 재밌는 영화하나?"하고 물었다. 그러고보니 아빠는 영화도 좋아한다. 어릴 때 주말이면 아빠와 언니, 나 이렇게 세사람은 동네 비디오가게에 가서 각자 하나씩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 안방 방바닥에 누워 함께 보곤했다. 아빠는 홍콩 느와르 영화, 언니는 해외에서 상을 받았다는 난해한 영화, 나는 그다지 정해진 취향이 없어서 아빠나 언니가 '이거 재밌겠다'라고 하면 대충 '난 이거!'하고 골랐다. 그때는 평생 그렇게 살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이제 언니와 나에게 각자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기껏 일년에 몇 번 다같이 모이게 되었다.

 우리 남편이야 말할 것도 없고 얌전한 우리 형부까지 아빠의 물음에 식은땀을 흘렸다. 언니는 할말은 하고 사는 사람이라 "아빠 난 좀 쉴래"라고 바로 철벽을 쳤고, 아빠는 실망한 기색으로 젊은 애들이 뭘 그렇게 힘들어하냐고 했다. 나도 너무 쉬고 싶었으나 마음이 약해져서 총대를 매기로 했다.

 '아빤, 나에게 맡기고 부디 다들 편히 쉬시길!'

 극장에 어떤 영화가 상영중인지 찾아보고 지금 바로 출발해서 안정적으로 볼 수 있는 영화를 추렸다. 범죄영화는 좀 질려서 가볍고 웃긴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대안이 없었다. 나쁜 녀석들이란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영화도  골랐고 이제 출발하기만 하면 되는데 아빠는 막내딸만 데리고 나가는게 영 성에 차지 않는 눈치였다. 한 명이라도 더 데리고 나가고 싶어하는게 너무 티났다. 사위들은 아무래도 어려우니 제일 만만한건 역시나 첫째 딸. 언니는 단호하게 의사표명을 했지만 아빠의 거듭된 회유에 마음이 약해져 결국 따라나섰다.

 영화는 내가 전에 봤던 범죄영화들을 한대 우려낸 맑은 국 같았다. 우려내고 우려내서 별로 우러나올 것도 없는 뼈로 우려낸 국물같은. 보는 동안은 관객들을 잡아두지만 극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그런 영화말이다. 아빠와 언니의 감상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왜 한국까지 장악할 만큼 영향력 있는 야쿠자 조직이 변변찮은 무기 하나 없이 몸으로 싸우느냐며 웃었다.

 집에 돌아오자 잠시 휴식을 취한 남은 가족들은 훨씬 생기있어 보였다. 저녁이 되었고, 이제 우리 남편이 깨어날 시간이었다. 그는 저녁으로 양꼬치를 먹으러 가자했다. 저녁은 집에서 먹으려 계획했던 엄마는 마뜩찮아보였지만 아빠는 다시금 활기넘치는 거리로 나가자는 둘째 사위의 제안이 제법 마음에 든 눈치였다. 나는 집에 엉덩이를 붙일새 없이 또 신발을 신어야 했다.

 양꼬치 집은 생각보다 좁았고 사람은 많았다. 우리 식구 모두가 함께 앉을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나눠서 앉기로 했다. 양꼬치에는 빠질 수 없는 칭따오가 곁들여지자 남편은 하루 중 가장 행복해보였다. 입에 모터를 단 듯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는데 그의 이야기 주머니는 한 번 열리면 닫힐 줄 모른다. 밤과 술. 이 두 가지가 그의 이야기 주머니를 여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매번 폭발적으로 에너지를 소비하고나면 다음날 쉰목소리로 "피곤해"를 연발하는 남편이었다.

그래도 양꼬치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배불리 먹고 마시다 보니 '캬, 이게 바로 명절이지!'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의 대미를 이렇게 양꼬치로 장식하는구나. 그런데 그때, 아빠가 또다시 조용히 검지 손가락으로 앞니를 톡톡 치기 시작했다.



 끝날때까지 끝난게 아니다.


"근처에 코인노래방이 있나?" 아빠의 화법은 항상 이런 식이다. 노래방 가자, 영화 보자, 쇼핑 가자 이런게 아니라 ~가 있나?, ~가 재밌나?, ~가 맛있나? 이런 식으로 에둘러 원하는 바를 전달한다. 그 질문에 대답을 하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그 장소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역시나 정신차려보니 나는 마이크를 쥐고 있었다.

 7명 모두 사이좋게 한 곡씩을 불렀고, 마지막은 나와 6살 조카의 'let it go' 합동공연으로 마무리했다. 내가 오천원을 더 넣으려는데 남편이 조용히 나를 제지했다. 모두 각자의 고삐가 풀리는 영역이 있었는데 나에게 노래방이 그러했다. 한 곡으로 만족하는 나머지 가족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조용히 주머니에 오천원을 집어넣었다.

 양꼬치에 코인 노래방까지. 정말 알찬 하루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제법 시원해진 밤공기를 마시며 우리는 집으로 걸어갔다. 이제 몇 분만 더 걸으면 집이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설빙 늦게까지 하나?"

아빠였다. 우리의 왼편에는 설빙 간판이 반짝였고, 아직도 사람들이 많았다.

끝날때까지 끝난게 아니라고 했잖아...


 아빠는 흠칫 놀라 얼음처럼 서있는 우리 모두에게 양꼬치를 먹었더니 입이 텁텁하다며 특별히 빙수는 본인이 쏘겠다고 했다. 엄마는 피곤하다고 어서 집에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히 따라갔다. 맞다. 엄마는 팥빙수를 좋아한다.


 에, 까짓거. 여기서 빙수를 더 먹고 가나 안 먹고가나 이젠 별차이도 없다. 막상 빙수가 나오니 모두들 잘 먹었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고 일어났다. 다행히 설빙이 진짜로 우리의 마지막 여정이었고, 우리는 12시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어난지 17시간만에 드디어 포근한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울 수 있었다. 부모님의 원래 취침시간보다 훌쩍 지난 시간이었지만 아마 내일 아침 기상도 평소처럼 하시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준비를 마친 남편도 곧이어 침대에 누웠다. 남편은 잠들기 직전 나에게 물었다.


 "여보, 내일 아버님 어머님 몇 시에 일어나실까?"

 "글쎄... 아무리 늦어도 7시 전에는 일어나시지 않을까?"

 "하아.......................................진짜 극한 추석이다."



그의 마지막 말에 나는 아침만큼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둘은 낄낄 웃으며 "진짜 장난이니다" "울 엄빠 내일모레 가심" "내일은 더 죽음"하고 우리 앞에 펼쳐진 내일의 운명을 희화화했다.


결국, 우리가 이렇게 뼛속까지 다른 사람일 수 밖에 없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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