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은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뮤 Dec 15. 2020

잘 쓴 문장의 가격

장강명 작가의 <팔과 다리의 가격>을 읽고

0. 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하여



프랑스어로 '오마주(Hommage)'는 존경, 경의를 뜻한다. 하지만 이 단어는 영화용어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오마주는 후배 영화감독이 선배 영화감독의 작품을 차용하거나 모방하여 그 작품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에도 오마주가 가능할까?



이런 엉뚱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자마자 책상 위에 널브러져있는 노트를 하나 펼쳤다. <팔과 다리의 가격>이라는 제목을 모방하여 '글과 문장의 가격'이라고 적었다가 이내 연필로 두 줄을 찍찍 그었다.



잘 쓴 문장의 가격.



흠, 고심 끝에 나온 제목이 썩 마음에 들었다. <팔과 다리의 가격>이 북한 대기근 시절을 오롯이 살아낸 한 소년, 잘린 한 팔과 한 다리가 아니라 남아있는 한 팔과 한 다리로 희망을 노래하는 한 청년의 이야기라면 내가 쓸 <잘 쓴 문장의 가격>은 이런 안타까운 역사의 한 순간을 잘 다듬어진 문장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한 작가의 노고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명확하다. 잘 쓴 글을 요목조목 살펴보며 이를 통해서 나는 어떻게 써야하는지 해답을 얻기 위해서다. 더불어 좋은 글을 세상에 내준 작가에게 조금이나마 존경의 마음이 가닿기를 바란다.







1. 문장 길이에 대하여



장강명 작가의 문장은 대체로 짧다. 소설이나 에세이, 장르가 달라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팔과 다리의 가격>에서도 대부분의 문장은 한, 두줄내로 끝난다. 짧고 간결한 문장은 가독성을 높인다.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일어난 대기근에 대한 내용이지만 결코 어렵지 않게 읽히는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미공급' 사태에 대하여의 첫 문단을 살펴보자.



북한 사람들은 1990 년대 중후반 당시 그들이 겪던 대기근을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미공급'이라고 불렀다. 식량배급이 끊어졌다는 의미다. 이 참사에 '고난의 행군'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북한 당국자들이었다.



네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문단을 보면 '간결한 문장'의 힘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북한 사람들은 1990 년대 중후반 당시 그들이 겪던 대기근을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르지 않고 식량배급이 끊어졌다는 의미로 '미공급'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길게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작가는 의미 단위로 짧고 간결한 문장들로 문단을 구성했다. 작가의 오랜 기자생활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장강명 작가의 이 간결하고 명료한 문체는 요즘 트렌드에 딱 맞는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물론 만연체가 사랑받던 시절도 있었다. 심지어 한 페이지의 반 이상이 한 문장인 글도 많았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책 읽는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읽는다 하더라도 긴 문장을 상대할 시간이 없다. 바야흐로 짧고 명료하게 쓸 줄 아는 능력이 작가의 새로운 덕목인 시대가 된 것이다.







2. 이 책의 형식에 대하여




<팔과 다리의 가격>은 분명히 소설은 아니다. 북한이탈주민 지원단체인 'NAUH'의 지성호 대표의 실제 이야기를 담은 글이기 때문이다. 장강명 작가는 이 책에서 지성호 대표의 이야기를 조금도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정확하게 분류하자면 르포르타주(보고기사, 기록문학)에 속하지 않을까싶다. 하지만 이 책은 묘하다. 르포르타주라고 하기엔 소설 같고, 소설이라고 하기엔 모든 배경과 사건이 사실이다.



책의 초반 '굶을 때 생기는 일에 대하여' '탄광마을의 삶에 대하여'는 기록문학의 전형처럼 보인다. 감정이나 작가의 생각은 배제한 상태에서 담담하게 사람이 굶주릴 때 발생하는 일에 대해서 서술하고, 탄광마을의 삶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때쯤 헛것을 보거나 환상에 자주 빠지게 된다고 한다. 눈 앞에 닭이 날아다니는 환영이 나타나기도 하고, 옆방에서 나를 빼놓고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먹고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자식을 토끼로 착각한 어머니가 젖먹이를 가마솥에 넣고 삶았다가 정신을 차리고 기절했다는 등의 괴담이 나도는 것도 이 시기다. (p.13)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 탄광마을 소년의 이야기가 등장할 때는 소설을 읽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마을 사람들이 떠나고 난 뒤 소년은 가족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 살려주세요!"
"옥란아, 살려줘!"
새벽 세 시였다. 단말마의 울부짖음이 어둡고 조용한 밤을 찢듯이 울려 퍼졌다. 내가 이렇게 크게 고함을 칠 수 있나, 하고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큰소리였다. (p.107)



탄광마을 소년이 석탄을 훔치기 위해 화물열차에 올랐다가 사고로 크게 다친 장면이다. 이렇듯 작가가 절묘하게 르포와 소설의 장점을 취했다. 그 둘의 조화가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다. 당시 시대배경과 사건들을 조금의 과장도 없이 전달하면서도 소설처럼 이야기에 푹 빠져 읽도록 잘 쓰여진 글이다. 기자였다가 소설가가 된 장강명 작가만의 독특한 이력이 <팔과 다리의 가격>이란 책에서 꽃이 피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담담해서 먹먹한




북한에서는 미공급 사태라고 불렸던 대기근 당시 매일 사람이 굶어죽었다고 한다. 길거리에 시체가 쌓여 있고, '옆 마을 누가 죽었다더라'가 '이웃 중에 누가 죽었다더라'로 바뀌고, 그마저도 '내 가족 중 누군가가 죽어다'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저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을 읽는 것인데 미간이 찌푸려지고 때로는 '헉'하고 숨을 참게 될 정도로 끔찍한 시절에 대한 글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독자의 감정을 더 끌어내기 위해 어떠한 장치도 두지 않았다. 미공급 사태의 현실을 잘 드러내주는 에피소드를 몇 개 골라 기술하고 있지만 어조는 담담하다.



이때를 시작으로 공개총살이 늘어났다. 농장에서 밭을 가는 데 쓰는 소를 잡아먹은 가족이 처형됐고, 탄광에서 쓰는 구리선을 훔쳐 국수와 바꿔 먹은 광부가 처형됐다. 도시에서는 한 주가 멀다 하고 공개처형이 벌어진다고 했다. 개중에는 옥수수 몇 개를 훔친 혐의로 총에 맞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p.61)



북한 사람들은 기근에 시달리다 절도를 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돼는 이유로 사람들이 공개총살 되는 상황을 설명할 때에도 감정은 배제되어 있다. 담담하게 당시 일어났던 일들을 나열할뿐이다. 그러나 작가 스스로 사건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감정을 절제함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




왜 남을 웃기려면 자기 자신은 웃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나. 그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독자가 글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하려면 때론 작가 자신의 감정은 철저하게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4. 그가 판을 까는 방식




작가라면 누구라도 지성호 대표의 사연을 듣고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실제 이야기 앞에서 어느 누가 구미 당기지 않겠는가. 하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따로있다. 장강명 작가가 지성호 대표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기로 결심한 이후에 내린 결정이다.



내가 만약 작가였다면 지성호 대표의 삶을 전기(傳記)의 형식으로 담으려고 했을 것이다. 최대한 그의 삶에 있었던 다양한 삶의 굴곡과 여정들을 생생하게 담아내려고 노력했을테지만 장강명 작가는 달랐다. <팔과 다리의 가격>은 전기(傳記)가 아니다. 장강명 작가는 지성호 대표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쓰고자하는 주제를 발견했다.



나는 고난의 행군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집중하려 한다. 굶는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면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는지, 인간의 존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그런 가운데에서도 동시에 인간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가치를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해 쓰려 한다. (p.9)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단순히 역경을 딛고 살아남은 한 사람의 삶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고난의 행군(미공급 사태)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의 인간에 대한 내용을 담고자 했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주제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이 이 책을 쓰는 목적에 대해서 썼다. 그리고 고난의 행군이라는 시대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람이 굶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기술했고, 뒤이어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탄광마을의 삶에 대해서 설명했다. 특수한 상황과 배경을 모두 기술하고 난 후에 비로소 고난의 행군(미공급사태)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한다.



이는 마치 꽃 한 송이를 그려넣기 위해 제일 먼저 캔버스 위에 하늘과 땅, 풀 등의 배경을 그려넣는 것과 같다. 독자가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정보를 먼저 주는 것이다. 독자는 시대 상황과 공간적 배경을 먼저 머릿속에 그려넣었기 때문에 뒤이어 나오는 탄광마을 소년의 이야기에 바로 몰입할 수 있었다.



이게 장강명 작가가 판을 까는 방식이다.






5. 어느새 나를 향한 카메라




책의 마지막장을 넘길 때, 장강명 작가의 시선이 독자인 나를 향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글을 시작할 때는 탄광마을 소년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마지막 장에는 뜬금없이 작가 본인이 등장한다.



네 이름이 뭐냐.

내 이름은 장강명이다. 한국에서 소설을 쓰는 작가이고, 나이는 마흔네 살이다. 고난의 행군이 벌어질 때 나는 20대 초반이었다. 당시 남한은 경제호황 속에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내 또래는 'X세대'로 불리며 호황의 거품을 만끽했다. (p.118)



작가는 어떻게 지성호 대표를 알게 되었는지, 그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보았고 왜 글을 쓰기로 결심했는지를 적었다. 하지만 책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소년 같은 얼굴을 한 청년이 말한다. 내가 받아 적은 피와 고름의 이야기에 창문을 만들어 열어주면서. 잘려 없어지지 않은, 그가 갖고 있는 팔과 다리의 힘에 대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대해서.

그건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p.132)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느새 카메라는 나를 향해 있었다. 내가 마이크를 쥐고, 그 부름에 답할 차례였다. 작가는 예고도 없이 책 밖으로 손을 뻗어 우리를 무대 위로 끌고 올라왔다. 우리가 더이상 수동적인 감상자로 남아있을 수 없도록. 탄광마을 소년에서 장강명 작가로, 장강명 작가에서 나에게로 넘어온 바통. 이 독특한 엔딩 때문에 <팔과 다리의 가격>은 다른 책보다 여운이 진하게 남았다.







6. 어떻게 쓸 것인가




호기롭게 장강명 작가의 <팔과 다리의 가격>에 대한 오마주 글을 써보겠다 밝혔지만 생각처럼 잘 전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글을 쓰며 좋은 작가는 잘 쓴 문장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작가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자신의 목소리를 가져야한다. 또한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을 영민하게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첫 문장에서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진두지휘 할 수 있는 거시적인 시야도 필요하다. 한 권의 책이라는 완벽한 세계를 구축하는 조물주가 되어야 한다.




잘 쓴 문장의 가격, 그것은 결국 잘 만들어진 하나의 세계의 가치와 동일한 것이 아닐까.



© ddealmeida, 출처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4, 5월에 읽은 책 한 줄 정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