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을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갔다. 혼자 여행인데 황송하게도 방을 업그레이드해주셨다. 넓은 발코니와 킹사이즈 침대 숨통이 트이는 방의 크기가 맘에 쏙 들었다. 수다쟁이 남편이 없어서 적막 그 자체였다. 이것도 맘에 쏙 들었다.
그때, 남편의 전화. 우리 수다쟁이는 오늘만 벌써 3번째 전화인 듯하다. 곧 저녁 먹으러 나가야겠다고 하니 그제야 전화를 끊을 준비를 한다. 여행 첫끼는 넓적우동이었다.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지만 우연히 인스타에서 사진을 보고 바로 직감했다. '이거 완전 내 스타일이다'
두 가지 맛 소스에 푹 담가먹었는데 아주 맛났다. 혼자 하는 여행이라고 괜히 궁상맞게 보이기 싫어서(?) 사이드 메뉴까지 야무지게 시켰다. 새우튀김이 빠삭하고 탱글 하니... 넓적우동의 쩔깃쩔깃함과 환상의 궁합을 자랑했다. 식감이 폭발하는 첫끼였다.
저녁식사로는 기장미역국을 먹었다. 언제부터 미역국을 그렇게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가 않는 음식이다. 덕분에 출산 후 조리원에서 행복했다. 누군가는 물려서 미역국에 퍼런 미역을 보면 퍼렇게 질린다는데 나는 매일매일 질리지도 않고 잘 먹었다.
내가 간 식당의 주력메뉴인 가자미 미역국을 시켰는데... 앗 이번엔 실패다. 뽀오얀 국물에 씹는 맛이 느껴지는 기장미역은 조화가 실패할 수 있다고?! 아... 나는 해산물 베이스 미역국은 불호였던 것이다. 오늘 이 식사를 하기 전까지 몰랐던 사실이다. 바다의 비릿한 내음이 누군가에겐 침샘을 자극하지만, 나는 약간 거북했다. 그래도 공깃밥 싹싹 비우고, 미역국도 거의 다 해치운 걸 봐서는 썩 나쁘진 않은 식사였나 보다.
저녁 식사 후에는 근처 카페로 왔다. 이미 아침부터 긴 거리를 이동하느라 지친 상태였는데 이대로 숙소로 돌아가기엔 영 아쉬웠다. 카페는 낮에 왔더라면 더 좋았을 법한 곳이었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자리의 창 밖에 바다가 펼쳐져있는데 밤이라 그런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카페에서 쿠키 하나와 오렌지자몽티를 시켰다. 커피가 마시고 싶었지만 카페인슈레기인 나를 잘 알기에 꾹 참았다. 쿠키에 알알이 박힌 고소한 견과류와 화이트 초콜릿이 잘 어울렸다. 그런데 이렇게 맛있는 쿠키도 명함을 못 내밀정도로 오렌지자몽티가 엄청나게 맛있었다!!!!!!
극강의 단맛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비명을 질렀다. 와!!!!! 이거 미쳤다!!!!!! 근데 그 단맛이 전혀 인공적이지 않고 내츄럴했다. 엥? 어떻게 이렇게 달지?? 이건 좀 말이 안 되는데???? 그냥 오렌지 자체가 미친 듯이 맛있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맛이었다.
오렌지자몽티의 황홀한 단맛에 빠져있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수다쟁이씨였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딸내미의 얼굴도 볼 겸 영상통화를 했다. 통화를 하는데 대뜸 남편이 오렌지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길에서 오렌지를 싸게 팔길래 사 와서 방금 딸과 먹었는데 정말 미친 듯이 맛있었다고.
아하하하하하.
놀라운 우연이었다. 나도 방금 마신 오렌지자몽티 이야기를 해주며 '요새 오렌지가 제철'이란 결론을 끝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그 후에는 이번 여행에서 꼭 다 읽고 싶었던 <하루의 사랑작업>이란 책을 읽었다. 남편이 먼저 읽고 나에게 분명 내가 좋아할 거라며 추천해 줬다.
요새 우리 남편과 나의 화두는 정신분석, 무의식 같은 것들이다. 특히 남편은 상담사 자격증도 따고 싶어 할 만큼 푹 빠져있다. 남편과 나는 연애시절부터 결혼기간 내내 '소통의 방법 차이'로 고통을 겪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대의 소통방식에 한 줄기 빛이 된 것은 '기질성격분석 검사'였다. 남편이 먼저 받았는데 그 기질검사를 통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수많은 물음표들이 느낌표가 되었다.
그전에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그의 행동들이 하나둘씩 실타래 풀리듯 이해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해=수용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앞으로 그를 더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봤다.
그 후 남편은 자기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 했고, 부모와의 관계, 어린 시절의 경험들을 곱씹어보며 내면에 감춰있던 무의식을 발견해 가는 중이다.
1년 전만 해도 나에게 '명상'이나 '무의식', '심상화' 이런 단어들이 모두 낯설고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켰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사이비종교'를 떠올릴 때 일어나는 감정을 느꼈달까.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왜 이제야 이런 것들을 알게 되었나 통탄스러웠다.
나는 타인의 감정을 매우 예민하게 느끼고, 배려하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굳이 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스스로 찾아가며 받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소중한 관계는 나의 방어기제 때문에 잃기도 했다. 내가 조금 더 내면이 단단하고, 나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 받지 않았을 상처들이 참으로 많았겠구나 싶다.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가장 와닿았던 것은 내 '느낌'을 외면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게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외면하거나 바꾸려들거나 판단하지 말고 그저 받아들여줄 것! 그 느낌(감정)과 함께 거기에 있어줄 것! 내가 나의 감정을 자애로운 시선으로 그저 바라보고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감정은 자유로워지고 놓여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나에게 참 엄격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고 한 적이 있었나 싶다. 사진 속 못생긴 얼굴, 튀어나온 옆구리살, 작고 허름한 아파트, 성취하지 못한 많은 일들... 내 시선은 온통 '내가 아닌 것'이 되라고 나를 다그쳤다.
열심히 살고, 노력하는 것 좋다! 근데 그 이전에 지금의 나를 사랑하는 법부터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남편도. 더 다정하고, 더 능력 있고, 더 자상한 아빠로서의 '이상'을 들이밀게 아니라 그냥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연습을 해보자.
오늘은 우리 수다쟁이씨가 밤에 전화가 오면 꼭 사랑한다고 말해줘야겠다. 언젠가부터 낯부끄러워서 잘하지 않는 그 말들, 사랑의 표현들... 녹슬지 않게 매일 뱉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