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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May 01. 2024

네가 사람이 되면 좋겠다

둘째가 우리에게 찾아온 지 오늘로 8주 2일 차다. 5일 동결배아로 꽁꽁 언 채 우리를 기다렸던 너는 나의 자궁 깊숙이 이식되었고, 홀로 외로웠을 텐데 잘 뿌리를 내려 착상이 되었다.


그 무렵의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과거의 내가 쏟은 노력이 아깝다는 생각에 큰 고민 없이 용감하게 덤벼들었다. 나의 천진함과 지나친 낙관이... 종종 후회를 가져다주곤 했는데, 이번 일에 대한 판단은 조금 더 후일로 미루려 한다.


지금은 후회가 되려고 하는데, 미래에는 그때의 내 천진함과 낙관이 분명 두고두고 고마울지도 모른다.




임신테스트기를 확인 한 이후로 한 달 동안 나는 내가 아니었다. 매일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마라토너였고, 매일 거대한 돌덩이를 굴려 산을 오르는 시지프스였다.


첫째 임신 기간의 기억이... 왜곡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기억자체를 잊었던 걸까? 둘째 임신 후 입덧의 양상도, 강도도... 처음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가장 큰 괴로움은 매일 오후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강의였다. 입덧, 졸음, 무기력, 체증, 숨참 증상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혼자서 쉴 새 없이 텐션을 끌어올려 아이들 수업을 이끌어나가는 일은 정말로 쉽지 않았다.


특히나, 표정관리가 어려웠다. 가까스로 아픈 기색을 감추고 수업을 했지만, 그럴수록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감정과 표정의 부조화가 깊이 잠들어있는 우울을 깨웠다. 매 수업이 끝날 때마다 '아 죽을 것 같다'라고 했는데... 결코 과장된 표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숨이 너무 차고, 호흡이 가빠서 금방이라도 깨꼬닥 소리를 내고 실신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멈출 줄 몰라서였을까. 임신 6주 차에 첫 출혈이 있었다. 수업을 앞두고 미친 듯이 졸음이 쏟아져 잠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밑에서 '울컥'하는 느낌이 났다.


뭔지는 몰라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 나쁜 느낌에 얼른 화장실로 달려갔다. 붉은 피가 손바닥 만하게 팬티에 묻어있었다. 기분 나쁜 축축함과 비릿한 피냄새가 내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뒤이어 변기로 뚝, 뚝, 뚝, 뚝 계속 붉은 핏방울이 빠른 박자로 떨어져 내렸다. 피는 계속, 계속 내리며 변기를 붉은 피로 가득 채웠다.


"여.. 여보, 나 유산인가 봐"


이 말이 마치 큐사인이라도 된냥,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초기 유산은 흔히 있는 일이야, '하고 내 안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이제 겨우 몇 주 뱃속에 있었던 것뿐이야. 너랑 그렇게 깊은 사이도 아니고, 좀 아쉽지만 그렇게까지 슬퍼할 일이 아니래도?' 또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하지만 서럽게 엉엉 울어대는 내 목소리에 묻혀 생각은 금세 힘을 잃었다.


 첫째 아이 임신 때는 피를 본 적이 전혀 없던 나는 쏟아지는 피를 보자마자 바로 '유산'이라는 생각 밖에는 할 수 없었다.


나만큼이나 새파래진 얼굴의 남편은 그래도 나를 진정시켜주었다.


"아직은 몰라. 너무 걱정 말고, 우선 병원에 가보자."


다니고 있던 난임병원은 차로 빠르면 40분 막히면 2시간 가까이 걸리는 곳이어서 급한 대로 집 근처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50대의 남자 의사 선생님은 이런 상황이 처음이어서 굳어버린 산모의 표정을 보고도 예의 그 권태로운 표정과 사무적인 태도로 초음파 검사를 했다. 내 뱃속에 들어간 기구를 뒤적뒤적하며 열심히 태아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커다랗고 동그란 검은 원은 보이는데 그 안에 있어야 할 아주 작은 하얀 점이 보이질 않았다.


심장박동이 가파르게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아니야. 설마.. 이렇게 쉽게? 이렇게 허무하게?


머릿속이 온통 내 비명으로 가득 찰 동안에도 열심히 뒤적이며 태아의 흔적을 찾던 의사 선생님은 한참 후에서야 "저... 여기"하며 입을 뗐다.


"여기.. 태아가 아직 있는 것 같죠? 여기.. 잘 보시면 희미하게 깜박깜박.. 심장도 뛰고 있는 거 같은데... 그래 보이죠?"


오히려 산모인 나에게 확신을 얻고 싶어 하는 그 질문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네, 네, 보여요! 저기 진짜 깜박깜박 거리네요"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뿌옇고 희미한 초음파 이미지에 영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출혈이 많을 때는 초음파 화질이 안 좋다고 한다)


아까부터 확신이 없는 말투로 신뢰감이 바닥을 쳤는데... 그 의사 선생님께서는 "뭐, 유산방지 주사라도 처방을 해줄까요?"하고 나에게 묻자 '여긴 다시 안 올 거야'하고 속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어떠한 처방도 받지 않고 나왔다. 물론, 내가 원래 다니던 난임병원이 있기에 조심스러운 그 의사 선생님의 상황도 이해는 가지만... 적극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액션 없이 관망하는 태도가 괜스레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아기가 '아직까지'는 살아있다는 안도감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원래 다니던 난임병원에 상황을 설명하고 진료를 보러 다시 출발했다.


난임병원에서는 수액과 주사, 추가 자가주사 처방까지 받고 '무조건 절대안정'을 취하고 누워있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장 그날에도 수업이 있었지만 급하게 휴강공지를 하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폭풍 같은 시간들이 지나고 집에 돌아와 어두운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말했다.


'너 드디어 쉴 수 있는 거야?'


대답 대신 눈물이 차올랐다. 응... 이제야 겨우 쉰다. 이젠, 나 스스로도 쉬어도 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야.


지나치게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열심히 살라고, 살라고, 외치던 그 목소리는 자취를 감췄다. 이런 식으로 백기를 들게 될 줄은 몰랐겠지.


그날 이후로 나빴던 컨디션은 끝을 모르고 점점 더 나빠졌다. 다행히 누워만 있으니 출혈은 그날 저녁에 멈췄지만, 숨 쉬고 누워있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몸이 아프니, 마음이 병드는 느낌이 들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와 엄마를 찾는데도 마음에 거리가 생기고 부담스러웠다. 내가 내 딸아이에게 느낄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감정이라... 놀라웠고, 섬뜩했다. 잠시 잠깐... 마음의 병을 깊게 앓고 있는 엄마들이 이런 감정일까? 공감을 했다는 것조차 수치스러웠다.


그렇게 일주일은 죽은 듯 쉬었다. 갑작스레 취소한 수업 때문에 쉬면서도 가시방석에 누운 기분이었다. 내가 아무리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더라고, 모두는 각자의 사정이 있고... 또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사정이 가장 중요하니까... 어머님들께서 아무리 걱정 마시고 푹 쉬시라고 따듯하게 위로를 해주셔도 미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다음주에 다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했다. 내가 내 상태를 가장 잘 아니까, 이대로는 절대 불가능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에겐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못지않게 소중하고,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뱃속에 둘째 아이. 아직 뚜렷한 형체도 없고, 느껴지지도 않는 그 아이를 얻기 위해서 그 수많은 인연들을 놓아야 한다니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를 얻기 위해... 이렇게 많은 희생이 필요할 줄은 몰랐는데...




마음속에서 후회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런데, 하혈이 있던 그 날의 그 피비린내와 머리를 가득채우던 내 울음소리가 다시금 선명하게 떠올랐다.


정든 학생들과의 헤어짐도 생각만 해도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겨우 2주 동안 내 뱃속에 품고 다녔던 그 형체도 없는 네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니... 나의 세상도 함께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몰라. 상황판단이고, 이성적인 생각이고 다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터진 내 눈물과 그때의 그 허무와 상실... 그것만이 진실이라 생각한다.


가르치던 아이들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하지만, 지금은 내 뱃속의 아이가 "사람"이 되길 간절하게 바라는 그 마음뿐이다. 아직 기회가 있으니까, 아직 심장이 멈추지 않았으니까, 네가 사람이 되어 나올 때까지 이 엄마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 마늘만 먹고 버틴 곰처럼 그렇게 참고 또 참아보려 한다.


나는, 네가 정말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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