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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May 08. 2024

우리는 다 어린이

오늘이 어린이날이라고 한다. 나는 오늘도 하루종일 자고, 먹고, 울렁거림을 참으며 하루를 보냈다.


남편은 오늘도 딸아이를 데리고 키즈카페에 다녀왔다. 점심을 먹고, 또 낮잠을 자고 나니 딸아이와 남편이 돌아왔다. 신나게 놀았는지 아빠 품에 잠든 채 안겨 온 딸을 이불에 내려놓고, 이어 남편도 밀린 낮잠을 잤다.


나는 잠시 무료함을 느끼며 TV를 보다가 또 깜박 잠이 들었다. 한 이틀 무기력증이 나아진 듯했는데 오늘은 다시 돌아왔나 보다. 손하나 까딱하기 싫고, 어떤 생각도 하기 싫고... 그냥 창 밖으로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저녁식사로 남편이 지은 밥과 미역국 큐브(뜨거운 물에 넣으면 미역국이 되는)로 간단히 미역국을 먹었다. 딸아이는 스파게티, 남편은 매운 라면... 각자 단출하고 간단한 제각각 식사를 한 자리에서 했다.


평소 요리 담당은 남편이라서 나는 거의 요리를 하지 않는다. 라면 끓이기나 음식 데우기 정도. 그런데 오늘 식사가 유난히 조촐하게 느껴지며 아이에게 미안했다. 어린이날이라던데... 엄마는 임신초기라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무기력하게 있다니.


저녁을 너무 간단히 먹어서인지 한두 시간 지나자 또 울렁거림이 심해졌다. 먹덧 증상은 많이 약해졌는데... 또 기분 나쁜 허기와 울렁거림이 느껴지자 바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남편은 옆에서 이거 먹래? 저거 먹을래? 연신 물어보는데...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어서 참으로 곤욕스러웠다. 그래도 뭐라도 생각나는 걸 말해보라고 해서 "감자랑... 고구마"라고 했는데 남편이 갑자기 격양된 목소리 잔소리를 퍼부었다.


요지는... 항상 이렇게 배고파지는 걸 알면서 왜 미리미리 먹을 만한 음식을 주문하거나 사놓지 않느냐는 거다. 리스트라도 만들어서 알려주면 준비해 놓을 텐데... 이렇게 매번 배고파서 괴로워지면 그제야 메뉴 걱정을 하고, 고민하며 뒤늦게 해결하려고 하냐고.


맞는 말인데 화를 내며 쏟아내니 나도 화가 났다.


남편은 남편대로 내가 아프니 아이 챙기랴 밥 하랴 나 보살피랴 짜증이 이만저만한 게 아닌가 보다. 나도 미안해서 그나마 컨디션이 조금 돌아온 엊그제와 어젯밤에는 쌓여있는 설거지도 하고 쓰레기도 버리고 오고... 나름 노력했는데 괜스레 억울했다.

 

그냥, 당신이 임신해 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침에 먹고 싶었던 게 점심엔 생각만 해도 싫어지고, 30분 전에 먹고 싶어 시킨 메뉴가 막상 입에 넣으니... 니글거려 괴로운... 나도 내 장단에 맞추기가 너어어어어어어무 어려워서 매 끼니가 돌아오고, 허기가 돌아오는 게 너어어어어어무 무섭고 싫은.... 그 심정을 알까.


남편은 내가 허기져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게 같이 힘들고 괴로워 미리미리 내가 그러지 않도록 내가 더 부지런히 대비책을 세워두었으면 하는 마음인데... 그의 걱정이 화난 목소리로 쏟아지니 비난받는 느낌이 들었다.


남편은 항상 걱정을 화를 내며 한다. 그 마음만 보자고 매번 되뇌어도 나는 그의 '언성'이 발작버튼이 되고 만다.


아니.. 근데 왜 화를 내!


예전엔 그가 화내며 말할 때마다 조곤조곤 그 부분을 짚었는데 이게 무한반복이 되니 나도 바로 언성높아진다.


여보 말 뜻은 알겠어! 근데 왜 화를 내며 말해? 그냥 내가 걱정이 되어 하는 말이라면 좀 다정하게 이렇게 이렇게 해보면 어때? 하고 부드럽게 말해줄 순 없어?


나의 말에 "알았어, 알겠는데..

"라는 말을 한 후에 또 화를 내면 아까와 같은 말을 반복하는 남편. 또 요지는 내가 미리미리 할 수 있는데 안 하고 괴로워만 하고 있으면 자신은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고, 본인도 힘든데 힘들어하는 나를 보면 더 힘들다... 이었다.


남편과 대화는 항상 그런 식이다.


나는 공격적인 어투에 대해 화가 났는데, 남편은 항상 자신의 말을 납득시키는데만 모든 에너지를 쓴다.


또 별것 아닌 일에 싸워버렸다. 어린이날인데... 딸에게 또 미안했다.


싸움이 끝나고 내 방으로 돌아와 누워 다시금 상황을 복기해 본다. 남편의 의도는 역시나 나를 향한 걱정과 그 상황을 당장 해결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상태에 대한 짜증이었다. 그렇다면 격앙된 목소리톤에 반응하지 말고, 그 의중만 파악해서 부드럽게 해석하지 못한 나의 옹졸함이 문제였을까?


그래도... 그런 식으로 누군가 나에게 말하는 것은 싫은데...


빙글빙글.


돌고, 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또 그 모두의 잘못. 우리는 어른의 탈을 쓴 두 명의 어린이.


우리 집안에는 총 세 명의 어린이가 어린이날을 보낸 셈이다. 나잇값을 못하는 두 명의 어린이가 진짜 사랑받고, 즐거워야 하는 한 어린이에게 참으로 미안한... 날이다.



엄마가 미안해.


나는 잠들기 전 쿠팡으로 내가 빈 속에 급히 먹을만한 음식을 잔뜩 사놓았다. 그리고 잠들기 전 남편에게 카톡을 하나 보냈다. 여보 말이 맞다고, 다음엔 조금만 부드럽게 말해달라고. 그리고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내년 어린이날에는 우리 딸에게 진짜 어른으로서 멋진 어린이날을 보낼 수 있게 해주겠다 다짐하며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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